신 시장으로 여겨진 디지털 헬스케어 업계에 혜성같이 등장한 의료기기 벤처기업인 A업체는 최근 국내시장을 포기하고, 해외시장으로 눈을 돌리고 있다. 국내시장에서 수익을 얻기란 시간낭비라는 판단에서다.
A업체는 창업 후 4년 동안 줄곧 식품의약품안전처로부터 의료기기 임상시험 및 허가를 받기 위해 노력해왔지만 최근 신의료기술 평가가 발목을 잡고 말았다. 근래 들어 임상시험과 신의료기술을 통합 평가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A업체에게는 그저 '남의 나라 이야기'일 뿐이다.
최근 몇 년 동안 '디지털 헬스케어 분야'가 차세대 성장 산업동력으로 인정받으며, 많은 벤처·스타트업이 창업하며 시장에 뛰어들고 있다.
하지만 이른바 '블록버스터'는 아니더라도 국내에서 뚜렷한 성공가도를 밟고 있다고 평가할 만한 업체들은 나오지 않고 있는 상황.
이러한 현실에 전문가들과 현장에서는 공통적으로 '시장 환경이 세계적 변화의 흐름과 달리 정부에 따라 가고 있다'는 비판을 쏟아놓는다. 그렇다면 왜 국내에서는 벤처·스타트업 기업이 수익을 창출하기 힘든 것일까.
걸음마 수준인 정부
디지털 헬스케어 분야 주무부처인 보건복지부는 올해 진료정보교류 사업을 시작으로 업계가 규제라고 지적하는 부분에 대한 개선작업에 돌입했다.
현재 복지부가 가장 중점적으로 여기고 있는 개선방향은 '데이터 융합'.
복지부는 진료정보교류를 가능하도록 함으로써 EMR 기록 등 다양한 의료정보를 활용할 수 있는 인프라를 마련하는 동시에 관련된 인증제를 도입해 다양한 형태의 의무기록을 표준화하겠다는 복안이다.
이렇게 융합된 데이터들을 보건·의료 벤처·스타트업 기업들이 활용할 수 있도록 건강보험심사평원이 운영 중인 '보건의료빅데이터개방시스템'처럼 일정한 플랫폼을 통해 제공하겠다는 방침이다.
실제로 대한의료정보학회 박래웅 이사장은 "1980년대의 쌀을 반도체에 비유했다면, 4차 혁명에서 쌀은 데이터"라며 "우리나라는 인프라는 잘 돼 있지만 데이터 질이 높은가에 대한 의구점이 있고 유전체, 시그널, 영성, 바이오뱅크 등 각각의 데이터가 흩어져 있다"고 지적했다.
결국 문제는 정부의 제도적 인프라 마련이 너무 더디다는 점. 이에 현장에서는 수준 높은 의료정보를 보유하고 있지만, 이를 담아낼 그릇이 없다는 한숨 섞인 불만들만 털어놓고 있다.
A 의료기기업체 대표는 "신규 멘토링 사업 등에도 참여하고 있는데, 스타트업 등으로 창업하는 것을 보면 실제로 디지털 헬스케어 분야의 비율이 높은 것이 사실"이라며 "하지만 수익 창출로 연결되는지 보면 전혀 될 수 없는 구조다. 기술적으로 구현할 수 있을지 몰라도 막상 국내에서 시작하려면 제도상의 규제가 너무나 많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A 의료기기업체의 경우도 지난 정부 시절 원격의료 허용 등이 포함된 디지털 헬스케어 시장에 대한 제도 개선 움직임이 일자 신규 부서 신설과 함께 대대적인 투자를 했지만, 새 정부 들어서며 관련된 제도 개선이 없던 일이 돼 버렸다.
그는 "지난 정부 시절부터 디지털 헬스케어 분야가 각광을 받았지만, 현재는 그동안 추진됐던 제도 개선 사항들이 폐기되는 방향인 것 같다"며 "새로운 부서까지 만들며 연구·개발 부문에 신규투자를 했는데, 제도가 시장의 환경이 아닌 정권을 따라가는 것 같다. 기업들이 긴 안목을 갖고 투자할 수 없는 환경이 우리나라의 현 실상"이라고 한숨을 내쉬었다.
사문화 돼 가는 개인정보 가이드라인
업계에서는 최근 정부 부처들이 함께 마련한 '개인정보 가이드라인'의 경우도 현장에서 활용하기 어렵다는 의견이 분분하다.
지난해 국무조정실을 포함해 미래창조과학부, 보건복지부 등 관계부처가 모여 개인정보 비식별화를 위한 가이드라인을 마련, 현장에서 활용할 수 있도록 배포한 바 있다.
하지만 가이드라인을 둘러싸고 현장에서는 이를 적용하기 어렵다고 하소연하고 있는 상황.
정부의 디지털 헬스케어 분야 사업을 맡은 한 유헬스(u-health) 업체 대표는 "범부처 차원에서 개인정보 비식별화를 위한 가이드라인을 마련했다"며 "많은 디지털 헬스케어 분야 업체들이 축적된 개인 질병정보 데이터를 바탕으로 개발하고 있는데, 이를 공유하기 위해선 비식별화가 선행돼야 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하지만 정부가 간과한 것이 식별 정보와 비식별 정보, 민감 정보와 그렇지 않은 정보에 대한 정의를 내리지 못한 것"이라며 "가이드라인이라면 기본적으로 현장에서 활용할 수 있도록 명확한 정의를 내려줘야 하는데 이런 측면에서 상당히 아쉽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특히 이러한 가이드라인 마련에 참여했던 정부 측도 가이드라인을 현장에 적용하기는 어렵다고 인정했다. 간단히 말해 '사문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가이드라인 마련에 참여했던 정부 관계자는 "관계부처가 모여 가이드라인을 마련했지만 뚜렷한 비식별을 위한 개인정보의 정의를 내리지 못하고 추정하는데 그쳤다"며 "가이드라인이 정의를 내려주지 못하고 추정하다보니 개인정보 문제가 생길 것을 우려해 전혀 현장에서 적용하고 있지 못하다"고 평가했다.
이어 "현장에서는 개인정보가 문제가 될 경우 민·형사상의 법적 제제를 받을 수 있기에 선뜻 가이드라인을 믿지 못하는 것"이라며 "관계부처들은 이에 대한 책임소재 문제 때문에 개인정보와 관련된 문제에 대해선 한 발짝도 못 나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라고 말했다.
정부도 업계도 컨트롤타워 부재
전문가들은 디지털 헬스케어 분야 벤처·스타트업이 발전하기 위해선 정부의 컨트롤타워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한 시점이라고 조언한다.
그동안 미래부와 복지부, 산업부가 디지털 헬스케어 분야와 관련된 R&D 투자와 제도 개선을 담당하면서 뚜렷한 주부부처가 불분명하다는 지적이 제기돼 왔다.
다행히 새 정부 들어서면서 범부처 차원의 '4차 산업 특별위원회' 구성이 추진되고 있다.
오송첨복의료재단 선경 이사장은 "4차 산업혁명이 주목을 끌면서 정부도 R&D 연구 강화를 추진하고 있는데 IT산업에만 집중하고 있는 것 같다. 이를 강화시켜 의료와 융합하겠다는 것"이라며 "이보다는 처음부터 필요한 의료와 IT기술 모두를 융합해야 한다. 이것이 핵심기술로 디지털 헬스케어 분야를 국가 차세대 먹거리 산업으로 발전시키려면 필요한 모든 것을 처음부터 융합해 발전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선 이사장은 복지부의 역할 강조론을 주장했다.
선 이사장은 "핵심기술은 바이오·생명기술과 인공지능으로 대표되는 IT기술 모두를 포함하는 것인데, 복지부는 보건의료산업화의 주무부처로의 기회를 놓치면 안 된다"며 "복지부는 보건의료산업화의 철학이 무엇인지 분명히 밝혀야 한다"고 주장했다.
동시에 정부의 역할강화와 함께 디지털 헬스케어 분야를 대표하는 유관기관 마련도 필수적이라는 의견이다.
또 다른 유헬스(u-health) 업체 대표는 "현재는 제품을 개발할 때 개인정보보호법이나 의료법뿐만 아니라 유권해석이 필요할 경우가 상당히 많다"며 "하지만 디지털 헬스케어 분야의 벤처·스타트업들을 대표할 만한 단체가 없는 실정"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 때문에 각 벤처·스타트업 기업들이 개별로 대응하다보니 제도 개선에도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는 원인이 될 수 있다"며 "정부와 업계 모두 컨트롤타워가 마련돼 디지털 헬스케어 분야 발전을 주도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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