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대생으로서 몇 년을 정신 없이 살다 보니 필자를 비롯한 우리(이 글에서는 의대생)가 간과하게 된 것 있다. 지금의 삶은 누군가 우리만큼, 혹은 더 오랫동안, 더 간절히 원했던 삶이라는 것이다. 의대생, 즉 미래 의사로서의 삶 말이다.
그 누군가에게는 개인적 환경 또는 사회적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동기가 있었을 수도 있다. 부모님이 앓아오신 병이 있어 어릴 적부터 조마조마하며 살았을 수도 있고, '응답하라 1994'의 쓰레기처럼 가장 친한 친구가 불의의 사고를 당했을 수도 있다. 본인의 경험을 통해 훨씬 강력한 의지가 생겨나기 마련이다.
하지만 현실에서 더 애타는 짝사랑이 반드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듯이 불굴의 의지도 때로는 불공평한 숫자의 잣대로 좌절되어 버린다. 그리고 그들의 강력했던 동기는 우리에게 그만큼 무거운 기대감으로 얹혀지게 된다. 책 속의 히포크라테스, TV 속의 허준이 되어 부모님, 형제, 자매, 친구들을 치료해주고 또 마음을 치유하는 의사가 되어줄 것이라는 기대감.
사실 타인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한 부단한 노력은 의대생에게 그리 낯선 것이 아니다. 초등학교 때 받아쓰기에서 100점을 몇 번 받고 수업시간에 자신 있게 손을 들고 발표를 몇 번 함으로써 시작되었을 타인의 기대. 이에 부응함으로써 따라오는 반 친구들의 부러움은 그 어떤 것보다 공부가 쉬운 수단임을 알려주었고, 어른들의 칭찬은 고래를 춤추게 하듯 우리를 이 길로 걸어가게 만들었다.
의대생의 이런 삶을 조금 더 객관화하기 위해 매슬로우의 욕구 5단계를 인용하자면 우리는 4단계 '존경 욕구'를 충족하는 것을 엔진 삼아왔던 것이다. 하지만 남들의 인정, 부러움 그리고 약간의 시샘을 동반한 외부의 보상은 일시적이고 나약하다.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우리는 이 보상에 대해 점점 익숙해져 가고 이것의 긍정적 강화 효과는 점점 작아진다. '존경 욕구'에 대한 충족이 유지되어도 이러한데, 만약 실패한다면?
의대생 대부분은 더 이상 1등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기대 받지 못하는, 주변인 모두가 잘난 의과대학생인 사회를 맞닥뜨렸다. 상위단계의 욕구로 나아갈 수도, 그렇다고 주저앉아버릴 수도 없는 상태에서 느끼는 혼란스러움과 좌절감에서 무엇이 우리를 지탱해줄 것인가.
매슬로우의 이론을 자세히 살펴보면 '존경 욕구'에는 사회적인 존경, 즉 타인으로부터의 인정만 포함된 것이 아니다. 이 단계의 세부적인 항목에는 self-esteem과 self-confidence, 즉 자존감과 자신감이 함께 자리하고 있다. 스스로의 인정없이 사회적인 평가 만으로는 5단계 “자아실현 욕구”를 위한 삶으로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이다.
올바른 길로 가고 있다는 스스로의 확신을 위해 개원가의 선배는 얼마를 벌고 의대교수님은 몇 시에 퇴근하며 외국의 의사는 얼마나 존경을 받는지 알아볼 필요는 없다. 평생 함께 할 동반자를 찾을 때 연봉과 취미와 가족관계를 다 떼고 그 사람 자체만을 보듯이, 평생 직업도 마찬가지다.
의사라는 직업 자체가 우리의 동기를 충분히 유발하는지, 자존감과 자신감을 가지기에 충분한지 고려해야 한다. 외부의 영향을 배제하고도 본인에게 가치있는 일이어야만 조직학과 산부인과학에서 D가 떠도 진급이 멈추되 의지는 이어질 수 있다.
현재 의대생으로서 '나'에게 확신이 없다면 타성에 젖어 그저 부유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을 것이다. 엄친아 혹은 엄친딸에 대한 기대, 그리고 허준과 히포크라테스에 대한 기대, 이런 타인의 기대는 막연한 이상과 비슷한 방향으로 우리를 흘려 보낼지 몰라도 절대로 끝까지 이끌어주지 않는다.
외부로부터의 안정감이 우리를 정체시키기 전에, 또는 좌절감이 무릎 꿇리기 전에 '나'의 원동력을 찾아야 할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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