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당직 때면 직원 식당에 닥터스 바(Doctor’s Bar)라고 해서 간식을 즐길 수 있는 조그마한 바가 하나 마련된다. 그곳에 가면 빵, 샌드위치, 컵라면, 과일, 음료수 등을 마음껏 먹을 수 있다. 첫 주말 당직 때 배가 고팠는데 레지던트 선배에게 정보를 입수하고 당직 동기들과 직원 식당으로 향했다. 노는 것, 먹는 것 모두 힘껏 일하고 짬을 내어 즐기면 그것이 꿀맛이었다.
학생 때는 질리던 직원 식당 밥이 맛있는 것도 그렇고, 주말 당직 때 동기들과 삼삼오오 모여 먹는 간식은 더할 나위 없이 흥겨웠다. 바빴던 첫 주의 일정이 비로소 마무리 되고 정신을 차리면서 서로 인계도 정리하고 과별로 인턴잡에 대해 이야기도 나눌 수 있었다.
첫 달이라 아직 혼선도 많고 익숙하지 않은 일도 많아 수술장 인턴들은 소위 '닦일 때'가 많다. 어리버리하게 처신하거나 허둥지둥 일처리하면 윗연차 선생님에게 신명나게 혼난다. 그때 우리는 '닦였다'라고 표현하고 하루종일 혼나면 '정신없이 닦인 날'이 된다.
늦은 저녁 10시 즈음 모여 수다를 떨었다. 며칠 사이 환자를 소독하면서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한 병동을 지속적으로 담당하다 보면 3~4일 정도만 지나도 환자들이 알아봐주고 이야기도 건넬 때가 많다. 환자들이 가장 좋아하는 일은 소독받는 일이고, 인턴의 입장에서도 가장 기분 좋은 일이 소독하는 일이다.
상처 부위나 시술 부위를 소독하고 필요한 거즈나 물품을 교체하는 작업을 '드레싱'이라고 한다. 이는 환자들이 집에서 혼자 하거나 보호자들이 할 수 있을 정도로 간단한 경우가 많아 채혈보다 부담이 덜하다. 환자 역시 채혈처럼 아프지 않고 시원해서인지 드레싱을 받을 때 기분이 좋아보인다.
호흡기내과 병동에는 환자들의 가슴관(Chest Tube) 드레싱이 잦은 편이다. '농흉(Empyema)'이라 하여 폐에 고름이 차는 경우엔 체내 바깥으로 배액하기 위해 가슴관을 설치하는데 하루만 지나도 고름이 한 움큼씩 나오는 환자들이 있다. 폐에서 매일 고름이 나오는데 찝찝한 건 당연한 일.
하루는 40대 아저씨 환자를 드레싱하는데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이고, 선생님 의사는 왜 한다고 하셨습니까?"
"솔직히 말씀드리면 부모님이 원하시기도 했고, 저도 전문직이니 안정적일 것 같아서 했습니다."
"여기 의사 선생님들 보면 여간 고생이 아니에요. 요즘엔 의사들 돈도 많이 못 벌잖아요."
"네, 그렇죠. 다른 나라는 의사가 공무원인 곳도 많아요."
"그러니깐. 이렇게 고생하는 것 보면 의사가 좋은 직업 같지도 않아."
그러고는 옆에 있던 보호자 아주머니도 선생님들 고생하는 모습을 보면 불쌍하다고 말씀하셨다. "여기 귀한 집 아들 한 명 고생하네 그려."
다른 날에는 젊은 아주머니를 드레싱하며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선생님. 이번 주부터 학생들 나온다면서요?"
"네. 이번주부터 의대도 개강해서 실습하는 학생들이 나올 거예요."
"그래요? 선생님은 6년 졸업하고 바로 오셨어요?"
"네. 저는 졸업하자마자 군대 안 가고 바로 왔어요."
"힘들지 않아요? 공부하는 것도 힘들고 졸업해서 의사가 돼도 힘든 것 같아요."
"어쩔 수 없지요. 그걸 다 감수하고 의사가 되기로 한 건데요. 아주머니 자식분들도 의대 보내시게요?"
"아니, 사위는 괜찮은데 우리 아들은 의사 안 시킬 거예요. 아들이 이렇게 고생하는 것은 싫어."
"하하, 사위는 괜찮아요?"
"사위는 괜찮지. 돈 잘 벌어다 주면 좋으니깐. 하지만 내 자식이 이렇게 고생한다고 생각하면 싫어."
간혹 병동이 들썩거릴 정도로 "의사 불러와" "나 언제 검사해" 하며 소리지르는 기운 좋은 할아버지 환자들이 있다. 그래도 대부분의 환자들은 의사들이 바쁘게 일하는 것을 알고 협조를 잘해준다. 힘들게 일하는 것에 대해 걱정해주시는 분들도 있다.
대화를 나누며 환자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되는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즐겁다. 설사 몸이 힘들더라도 즐겁다고 여기면 조금 덜 힘들 듯 말이다.
윗연차 선생님도, 간호사들도, 환자도 안 도와주고 보호자들도 싫어할까 걱정했던 것과 달리 모두들 잘 협조해주어 고마울 때가 많다. 아니면 애초에 기대를 하지 않아서일지도?
<9편에서 계속>
※본문에 나오는 '서젼(surgeon, 외과의)'을 비롯한 기타 의학 용어들은 현장감을 살리기 위해 실제 에이티피컬 병원에서 사용되는 외래어 발음 그대로 사용했습니다.
이 글은 박성우 의사의 저서 '인턴노트'에서 발췌했으며 해당 도서에서 전문을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