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둘째 날이다. 모닝콜이 오기 전에 눈을 떴는데 4시 반이다. 죽은 듯이 6시간을 넘게 잤으니 시차적응을 잘하고 있는 셈이다. 조심스럽게 화장실에 다녀온다고는 했지만, 부스럭대는 소리에 아내도 잠에서 깬 모양이다.
책을 읽다가 시간에 맞추어 식당에 내려갔는데 우리 말고도 여행팀이 묵은 듯 혼잡하다. 과일도 없고 차림도 시원치 않아 시리얼에 계란과 소시지 등을 곁들여 간단하게 아침을 마쳤다. 가이드 말로는 전형적인 2급 호텔이라고 한다. 꽤 많은 여행비용을 냈는데 대접(?)이 시원치 않은 느낌이 들었다.
조금 여유 있게 로비로 내려갔는데, 우리가 타고 갈 버스는 출발 20분 전에서야 나타난다. 가이드는 한술 더 떠서 출발 2분 전에 나타난다. 그리고 일행 가운데 한 분이 마지막으로 나타난다. 물론 약속한 시간에 출발을 했지만, 전날부터 시간이 제대로 통제되지 않은 부작용이 나타나는 것 같아 불길한 느낌이 든다.
버스가 출발하는데 보니 사방이 온통 자욱한 안개 속에 파묻혀있다. 장거리를 움직이는 여행에서는 잠시의 날씨변화에 일희일비할 필요는 없지만 오늘은 날씨가 맑기를 기대해본다. 출발한지 한 시간 정도가 지나면서 안개는 걷혔지만 구름이 낮게 드리워져있다. 그래도 구름이 얇고 검지 않다고 위안하는 순간 갑자기 쏟아지는 빗방울이 버스 앞차창을 가득 채운다. 그래도 우리가 향하고 있는 자다르까지는 버스로 4시간을 가야 한다니 마음을 느긋하게 먹는다.
창밖으로 흘러가는 풍경이 방금 내린 비로 선명해진다. 산기슭 그리고 계곡을 채운 나무를 물들인 단풍이 아주 곱다. 하나를 잃으면 하나를 얻을 수 있는 법이다. 자그레브에서 자다르로 가는 고속도로에는 터널이 헤아릴 수도 없이 나타난다. 재미있는 것은 긴 터널을 빠져 나오는 순간 날씨가 확연하게 다른 경우가 있다. 지형에 따라서 날씨가 급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자그레브에서 자다르까지의 거리가 만만치 않다는 것을 기억하자.
자다르로 가는 도중 갑자기 버스가 주유소로 들어간다. 알고 보니 가이드가 속이 불편했던 모양이다. 전날 혹은 아침에 먹은 음식이 문제였을 수도 있다. 속이 불편하다는 사람이 두엇 더 있었지만 식중독을 의심할 정도는 아닌 것 같아 지켜보기로 했다.
자다르(Zadar)는 크로아티아 서쪽 아드리아바다에 연한 달마티아 지방에 있는 인구 7만5천(2011년 기준)의 작은 도시다. 바다와 육지를 연결하는 지리적 여건이 좋은 탓에 파란만장한 역사를 거쳐온 것 같다. 역사적으로는 기원전 일리리아인들이 이주해서 살던 이곳을 로마가 점령하면서 도시의 형태가 갖추어졌다.
로마가 멸망한 뒤에 비잔티움제국에 귀속되었다가 9세기 말 크로아티아인들이 이주해 들어왔고, 12세기 후반 헝가리왕국이 점령했다가 베네치아에 팔았다. 1797년 나폴레옹에 의하여 베네치아 공화국이 멸망하고 프랑스를 거쳐 오스트리아에 속했다가 1805년에는 다시 이탈리아 영토가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유고슬라비아왕국의 일부가 되었다가 다시 이탈리아로,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이탈리아에서 유고슬라비아영토가 되었다.(1,2) 자다르의 역사를 정리하는 일은 쉽지 않아, 뼈대만 추려보았다.
자다르에 도착했을 때는 몇 점 구름만 떠가고 있을 뿐 화창하게 개여서 선글라스를 써야했다. 버스는 자다르시내를 지나 바다를 만나러 달려 나가는 것 같은 자다르반도 끝으로 향한다. 덕분에 구시가지로 들어가는 성문을 스쳐지나가야 했다.
반도의 육지 쪽에 있는 성문(Kopnena vrata)에는 베니스공화국의 상징인 '성 마르코의 사자'가 새겨져 있다. 자다르의 과거역사의 한쪽이 기록되어 있는 셈이다. 자다르반도에는 바다에서 쳐들어오는 외적을 막기 위해 쌓은 오래된 성벽이 있다. 성벽 곳곳에는 성안으로 통하는 작은 문들이 있고, 어디쯤에는 숨겨진 성문도 있다. 성벽 아래 도로를 지나 반도 끝에서 버스를 내렸다.
이곳에는 '해야 안녕; The Greeting to the Sun/Pozdrav Suncu'이라는 제목의 설치예술이 있다. 태양으로부터 명왕성에 이르기까지 태양계를 크기와 거리의 비례에 맞추어 배열해 놓았다. 그런데 낮 시간 동안 태양에 깔아놓은 태양전지를 통하여 얻은 전기에너지로 밤에는 빛의 마술이 펼쳐진다고 한다.
태양의 크기는 22미터에 달하는데 300개의 다층 유리판으로 채워졌다. 낮동안 태양전지가 만들어내는 전기의 양은 연간 45,500킬로와트에 달한다. 이 전기는 '해야 안녕'이 밤에 벌이는 쇼는 물론 해변의 전등을 밝히는데 사용된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하는 자다르의 석양이 지나고, 밤이 되면 태양에 설치되어 있는 LED입자들이 정해진 시나리오에 따라서 반짝이는데 가히 환상적이라고 할 빛의 잔치가 벌어진다고 한다.(구글의 이미지들을 검색해보시라!) 태양 주위에는 성인들의 이름과 축일, 그날 이곳에서 바라본 태양의 경사와 고도 그리고 일조시간 등이 새겨져 있다.
이는 자다르가 성 그리소고누스력(Saint Grisogonus Calender)과 깊은 연관이 있음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성 그리소고누스력은 1964년 옥스퍼드의 보들레이 도서관(Bodleian Library)에서 발견되었는데 1292년 혹은 1293년의 것으로 아라비아숫자로 쓰인 최초의 천문자료로 추정하고 있다.(3)
'해야 안녕'은 자다르의 건축가 리콜라 바쉬크(Nikola Bašićhas)의 작품인데 바로 이웃해있는 '바다오르간(The Sea organ/Morske orgulje)'과 깊은 연관이 있다고 한다. 즉 '해야 안녕'이 빛을 매개로 자연과 교감을 나타낸다면 '바다오르간'은 소리로 자연과 교감을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바다오르간은 '해야 안녕'으로부터 서쪽으로 조금 더 가서 바다로 내려가는 대리석 계단 아래 설치되어 있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피폐해진 자다르를 재건한다는 의미로 설치된 것으로 역시 리콜라 바쉬크(Nikola Bašićhas)의 작품이다. 해변의 옹벽에 폴리에틸렌 관과 공명통을 설치하여 바람과 바다의 파도가 내는 소리를 들려주는 것이다. 바다오르간은 2006년에 '유럽 도시 공공장소를 위한 상(European Prize for Urban Public Space)'를 수상했다.(4)
구경할 것도 많고 배도 고프지만 잠시 바다로 내려가는 계단에 앉아 바다가 들려주는 음악을 들어본다. 물론 우리에게 익숙한 멜로디를 연주해내는 것은 아니지만 호리병에 숨을 불어넣을 때 나는 것과 흡사한 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리고 보니 계단에서 굽어보는 바닷물이 그렇게 맑을 수가 없다. 물속을 헤엄치는 물고기가 손에 잡힐 듯하다.
참고자료
(1) Visit Croatia. History of Zadar.
(2) Wikipedia. Zadar.
(3) Zadar Tourist Board. The Greeting to the Sun.
(4) Wikipedia. Sea org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