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일째 여행은 5시에 일어나 7시에 출발한다. 여행사가 숙박비용을 절약하려고 두브로브니크에서 1시간쯤 떨어진 객실 서비스도 시원치 않은 네움에 묵었기 때문이다.
두브로브니크는 2011년 기준 42,615명이 거주하고 있는 크로아티아의 해안도시이다. 두브로브니크(Dubrovnik)는 참나무숲이라는 뜻의 두브라바(dubrava)에서 유래했다. 하지만 11세기 이전에는 절벽이라는 뜻의 라틴어 라우사(Lausa)에서 유래한 라구사(Ragusa)라고 불렀다.
이곳은 7세기 무렵 인근에 있는 로마도시 에피다우룸(Epidaurum)에서 피난 온 사람들이 정착하여 라우스(Laus)라고 불렀다. 이어서 이주해온 크로아티아사람들은 두브로브니크라고 불렀다. 두 집단은 지금의 스트라둔을 사이에 두고 살면서 서로를 의심하다가 종국에는 마을을 합치게 되었다고 도시의 유래를 설명해왔다.
하지만 이 지역에서 그리스 유물이 발견되면서 2007년에는 도시의 시작이 그리스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는 설이 제기되었다.(1)
로마제국이 멸망한 다음에는 비잔틴제국에 속하였지만, 십자군전쟁 이후에는 베네치아의 지배를 받았다. 1296년 8월 16일밤 발생한 화재로 인한 피해를 복구하기 위한 도시개발이 시작되었다. 지금 남아 있는 성벽은 베네치아 시기에 건설되었다.
1358년에는 자다르 평화협정에 따라 베네치아에서 헝가리제국의 속국으로 독립을 얻었다. 이렇게 성립한 라구사공화국은 1808년까지 독립을 유지하였다.
라구사공화국은 "세상의 모든 금을 주어도 자유와 바꿀 수 없다(Liberty is not sold for all the gold in the world)"는 좌우명을 가지고 있었다. 14세기 무렵 라구사 공화국은 북으로는 스톤을 지나 뼬예샤츠반도와 코르출라섬까지, 남으로는 몬테네그로의 부드바 인근까지를 영토로 하였다.
1458년에는 오스만제국과 협정을 맺어 조공을 바치고 오스만제국의 보호를 받게 되었다. 조공은 12,500두카트까지 올라 부담스러웠지만, 대신 라구사공화국이 오스만제국의 유럽교역의 창구역할을 맡음으로 해서 얻은 이익은 막대하였다.
오스만제국 또한 동방에서 들여오는 물품을 라구사공화국을 통하여 유럽에 넘길 수 있는 이점이 있었다. 공화국의 젖줄이었던 대외교역을 원활하게 유지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일 수밖에 없었다. 당시 유럽사회는 흑사병이 창궐하여 엄청난 피해를 입고 있었다. 1374년 처음 대유행을 일으킨 흑사병으로 유럽대륙에서는 인구의 약 30%에 해당하는 약 2천5백만명이 희생되었다. 흑사병은 1700년대까지 100여 차례나 발생하여 유럽 전체를 공포에 몰아넣었다.(2)
#i2#라구사왕국은 대외교역을 통하여 들여온 페르시아의학에서 급성전염병을 통제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즉 급성전염병은 환경이 불결해서 생기는 병이고 일정기간 동안의 잠복기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따라서 국외에서 들어오는 사람을 일정기간 격리 감시할 필요가 있다고 보았다.
의료보건장관 제이콥이 도시의 성벽 밖에 환자들과 외부인들을 위한 거주/격리 시설을 따로 마련하고 환자를 돌볼 것을 제안했다. 1377년 시의회는 이들에 대한 30일간의 격리 조치를 골자로 한 '트렌티노(trentino)'라는 법령을 포고했다. 법령의 핵심 사항은 다음 네 가지였다.
첫째, 흑사병 유행지역을 방문한 시민이나 방문자들은 도시 밖에서 30일 간의 격리 기간을 가져야 한다. 둘째, 라구사 시민들은 격리 중인 사람을 절대 방문해서는 안 되며, 방문할 경우 격리 지역에서 30일간의 격리기간을 지내야한다.
셋째, 시의회에 의해 지정된 사람 이외에는 격리 중인 사람에게 절대 먹을 것을 가져다 줄 수 없으며, 가져다 줄 경우 30일간의 격리기간을 지내야 한다. 넷째, 이 법령을 어기는 자는 누구나 30일간의 격리 기간을 지내야 한다.
라구사에서 시작한 격리조치가 유럽의 다른 도시로 확산되면서 격리기간이 30일에서 40일로 확대되었다. 이름 또한 트렌티노에 40이라는 의미의 이탈리아어 콰란타(quaranta)를 붙여 콰란티노(quarantino)라고 하였다. 이로서 격리조치를 의미하는 검역(quarantine)이라는 단어가 생긴 것이다.(3)
잘나가던 라구사공화국은 포르투갈이 아프리카를 돌아가는 동인도항로를 개척하여 오스만제국이 독점하던 동방교역을 나누면서 하향길에 들어섰다. 설상가상으로 1667년 4월 6일에는 강력한 지진이 발생하여 성벽을 제외한 시가지 전체가 피해를 입었고, 5천여명이 목숨을 잃는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이 지진에서 살아남은 건물은 스폰자궁전과 루츠광장에 있는 렉터궁전의 앞부분이었다고 한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혼신의 힘으로 도시를 재건하였다. 도시는 당시로서는 첨단의 바로크양식으로 다시 지어졌다.
1677년부터 오스만제국은 라구사제국을 합병하려 시도했다. 하지만 빈공격에 나선 오스만군이 패전하고 총사령관 카라-무스타파(Kara-Mustafa)가 죽음으로써 합병시도는 무산되었다. 1678년 라구사공화국은 오스만제국에서 합스부르그왕가의 헝가리제국으로 종주국을 변경한다. 나폴레옹이 달마티아지방을 점령하면서 라구사공화국 역시 1808년 나폴레옹군에 점령되어 역사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두브로브니크 관광은 일단 필레문을 통하여 입장해서 성안에 있는 건물들에 대하여 가이드로부터 개략적인 설명을 듣고, 일행 모두 참여하는 선택관광상품으로 스르지산에 다녀온 다음 자유 시간을 이용하여 성곽을 걷거나 성안의 풍경을 즐기는 순서로 진행하였다. 스르지산(Srd Hill) 전망대에서는 멀리 펼쳐지는 아드리아해를 향해 돌출한 두브로브니크성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9시부터 전망대로 올라가는 케이블카가 운행된다고 해서 우리는 30분 전에 도착했는데, 대기하고 있는 사람들이 문밖에까지 늘어서 있다. 전망대까지 왕복하는 과정은 한마디로 전쟁이었다. 두세번째 케이블카를 탈 수 있는 순서에 있던 우리 일행 앞에 막 도착한 버스에서 내린 중국관광객들이 새치기를 시도하여 우리 일행과 치열한 몸싸움을 벌였다. 더 황당한 일은 이들보다도 뒤에 버스에서 내린 일본관광객들은 더 앞으로 새치기를 하더라는 것이다. 일본사람들 참 많이 변했다.
일본사람들의 뒤통수치기는 전망대에서 내려올 때는 한술 더 떠서 아예 입장권확인절차도 생략한 채 뒷구멍으로 새치기해서 케이블카를 타고 내려가더라는 것이다. 중국사람들 역시 만만치 않아서 이번에는 현지 가이드가 나타나서 같은 그룹이라면서 이미 입장한 우리 일행을 내보내면서까지 뒤에 줄을 선 중국인들을 케이블카에 태우는 것이었다.
이날 두보르브니크 스르지산에서 벌어진 한중일삼국지는 일본의 완승으로 끝났다. 황당했던 것은 우리 일행이 현지 직원들에게 항의를 하는 와중에도 뒤에 서 있던 가이드는 손 놓고 있는 것이었다. 이런 일정관리가 사소해보이지만, 결국은 이날 오후 일정에 있던 스플리트에는 해가 진 다음에 도착하게 되어 제대로 구경을 하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번 여행을 안내한 가이드는 실망스러운 점이 많았다. 문제는 가이드를 만나는 것이 복불복의 영역이라는 점이다.
스르지산에서 내려와 필레문(Pile Gate)으로 입장하여 정식으로 두브로브니크성을 구경했다. 필레문이 두브로부니크성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통로이니 수비에는 유리하였을 터이나 모든 관광객들이 드나들어야 해서 복잡하기만 하다. 필레문 위에는 두브로브니크 성을 왼손에 든 이 성의 수호성인 성 블라이세(Saint Blaise)의 조상(彫像)을 모시고 있다.
라틴명으로 블라시우스(Blasius)인 성인은 4세기 아르메니아의 세바스테에서 주교로 활동하다가 로마황제 리키니우스의 기독교 박해로 순교하였다. 의학을 공부하고 사제가 된 성인은 의사로서도 명성이 높았다고 한다.(4) 두브로브니크가 블라이세를 수호성인으로 삼은 것은 두브로브니크를 위기에서 구했기 때문이다.
어느 날 두브로브니크 성당의 신부 스토이코(Stojko)의 꿈에 나타난 성인이 인근에 있는 로크룸(Lokrum)에 베네치아의 해군이 집결하여 공격을 준비하고 있다고 전한 것이다. 신부는 곧바로 수비대에 연락을 취하여 대응에 나서면서 베네치아 해군이 퇴각하였다고 한다.(5)
이후로 두브로브니크는 블라이세 성인을 수호성인으로 모시고, 매년 2월 3일에는 축제를 열어 성인을 경모한다. 1190년부터 시작된 것으로 믿어지는 축제는 민속 공연, 전통공예 등 다양한 행사가 진행되는데, 축제 전날 밤에는 도시 안 모든 교회의 종이 일제히 울리고, 평화를 상징하는 하얀색 비둘기를 날린다.
축제에서는 많은 신도들이 후두 관련 질병을 치료하는 의식에 참여하기 위해 모일 뿐 아니라, 전통에 존중으로 표하고, 본인들이 누리는 자유와 평화에 경의를 표하는 사람들도 참여하고 있어 2009년 유네스코의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6)
참고자료
(1) Wikipedia. Republic of Ragusa.
(2) 위키백과. 흑사병.
(3) 코리아헬스로그. 검역이란 뜻의 Quarantine의 유래.
(4) 위키백과. 블라시우스.
(5) Like Croatia. Famous croatian myths and legends.
(6) 유네스코와 유산. 두브로브니크의 수호성인 성 블라이세 축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