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용불량자인 한의사 이 모 씨는 아내 이름으로 서울 강동구에 병원 건물을 임차했다. 그리고 한의사 박 모 원장과 조 모 원장의 이름을 빌려 K한방병원을 운영했다.
이들 원장은 이 씨와 병원 순이익의 10%를 받기로 공동 약정을 체결했지만 박 원장은 매달 400만원을 받았고, 조 원장은 800만원을 받았다. 공동 약정에 따른 이익배분이 아니었던 것.
게다가 병원 직원 채용이나 퇴사를 결정하고 자금을 집행하는 등 병원 인사와 재무 관리는 이 씨가 담당했다.
K한방병원은 사무장병원이었고 사무장의 정체는 한의사, 즉 의료인이었다.
건강보험공단은 이 씨에게 이름을 빌려준 원장들을 상대로 3년치 요양급여비 6억3994만원 환수처분을 내렸다.
의사가 다른 의사의 이름을 빌려 병의원을 개설했을 때도 건강보험공단의 요양급여비 환수 처분이 적법하다는 최신 법원 판결이 나왔다.
서울고등법원 제4행정부는 최근 사무장에게 이름을 빌려준 원장들이 건보공단을 상대로 제기한 요양급여비 환수처분 취소 소송에서 원고 패소 판결을 내린 1심을 유지했다.
이들 원장은 "이 씨와 동업으로 병원을 공동으로 개설, 운영했을 뿐 명의를 대여하지 않았다"고 호소했다.
이와 함께 "건보공단이 적용한 의료법 4조 2항은 의료인이 다른 의료인 면허로 의료기관을 여러 장소에 개설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목적"이라며 "명의를 대여했더라도 한방병원 한 곳만 개설, 운영했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건보공단이 근거로 삼은 의료법 4조 2항은 의료인은 다른 의료인 명의로 의료기관을 개설하거나 운영할 수 없다는 내용이다.
2심 법원도 1심과 마찬가지로 박 원장과 조 원장이 이름을 빌려줬다고 판단하고 이들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의료법 33조 8항의 이중개설 금지 규정, 일명 1인1개소법을 위반하지 않았더라도 의료인이 다른 의료인 명의로 의료기관을 개설하면 의료법 4조 2항에 위반돼 적법하게 개설된 의료기관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재판부는 "고령이나 신용상태가 나쁜 의료인이 이름을 빌려 의료기관을 개설한 후 의료법 위반 행위를 저지르거나 영리목적으로 의료기관을 운영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의료인이 다른 의료인 명의로 1개의 의료기관을 개설하는 경우도 금지할 필요성이 있다"고 판시했다.
이어 "의료법 4조 2항은 수 개의 의료기관 설립을 막는 데 그치지 않고 다른 의료인 명의로 의료기관을 개설하는 것을 막는 것"이라며 "의료기관 개설 운영에 관한 책임 소재를 분명히 하고 의료인이 의료법상 의무를 위반하는 것을 방지해야 한다"고 밝혔다.
건보공단은 이번 판결이 1인 1개소법 위헌 소송에 영향을 줄 수 있다고 분석하고 있다.
이번 소송을 담당했던 김준래 변호사는 "의료법 4조 2항은 1인 1개소법의 입법 목적을 포함함은 물론이고 더 나아가 의료기관 개설 운영의 책임소재까지 분명히 하기 위한 제도라고 법원이 처음으로 명시했다"며 "2심 판결이라는 점에서 더욱 큰 의미가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이번 판결 법리에 따르면 의료인이 두 개 이상의 의료기관을 개설해 1인 1개소법을 위반해 형사처벌까지 받으면 부당이득 징수 처분의 적법성을 더욱 쉽게 인정할 수 있는 것"이라며 "현재 진행 중인 1인1개소법 관련 위헌 소송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줄 수 있는 판결"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