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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집도의 전통

박성우
발행날짜: 2016-08-10 05:00:50

인턴의사의 좌충우돌 생존기…박성우의 '인턴노트'[45]

초집도의 전통

초집도의 오랜 전통이 있다. 모든 의사들의 첫 수련도 그렇지만 특히 서젼들은 사람 몸에 칼을 대기 때문에 약을 쓰는 간단한 처치에 비해 수련도 신중하고 시작도 제법 신성시된다.

수술은 보통 종류에 따라 2명에서 4명까지 팀을 이루어 진행한다. 그중 오퍼레이터, 즉 집도의라 하여 수술에 대한 총 책임을 지고 진행하는 서젼이 있다. 그 외에는 어시스턴트라 하여 집도의를 돕는 역할을 한다.

대개 집도의는 팀 사이에서 가장 경험이 출중한 서젼, 종합병원에서는 교수님들이 집도를 맡는다. 전공의와 인턴은 첫 번째 어시스턴트, 두 번째 어시스턴트를 맡을 때가 많다.

집도 과정은 많은 수련 과정과 경험이 필요하다. 하지만 교수님들도 첫 시작이 있었듯 서젼으로 수련을 시작하는 전공의에게도 처음은 있다. 전공의 수련 중 스스로 집도의가 되어 첫 수술을 진행하는 것을 '초집도'라고 한다.

일반외과에서는 이것이 전통으로 더 특별하게 다뤄진다. 초집도는 쟁쟁한 노교수님들, 외과 과장님을 비롯하여 세계적으로 명성이 자자한 대가의 반열에 오른 교수님들과 1대 1로 신입 전공의가 짝을 이루어 1년 내내 진행된다.

아침 8시부터 공장처럼 돌아가던 수술실들이 하나 둘 끝나가던 무렵 치프 레지던트 선생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응급 충수돌기염(또는 맹장염) 수술이 외과 과장님 집도하에 있으니 준비하라는 전화였다.

대개 충수돌기염 수술은 간단한 수술에 속하기 때문에 암 수술로 수술 일정에 여유가 없는 대형 종합병원에서 진행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이런 환자가 응급실을 통해 내원하면 수술이 바로 가능한 2차 종합병원으로 트랜스퍼를 보내고 간혹 환자 상태가 위급하고 여력이 될 때만 응급 수술로 진행한다.

정규 시간에는 몇 개월 전부터 예정된 암 수술로 인해 수술실 여분이 없고, 야간에는 간이식이나 신장이식 등 어려운 수술들로 서젼이나 마취과 의사나 여력이 없다.

더욱이 종합병원에서 충수돌기염 수술은 외과 과장님이 직접 집도하는 경우를 사실상 볼 수가 없다. 대개 젊은 교수님이나 당직 외과팀에서 응급으로 진행한다. 그래서 무슨 환자이기에 과장님이 직접 집도하신다는 것인지 의문을 가지고 준비했다.

곧 대장항문외과의 모든 선생님이 수술실에 내려왔다. 알고 보니 외과 과장님이 초집도를 전수하기로 하고 준비한 수술이었다. 일반 외과 서젼들의 경우 대부분 충수돌기염 수술로 초집도를 한다고 했다. 건강한 젊은 환자에게 발생하는 충수돌기염은 상대적으로 난이도가 쉬운 만큼 오늘 같이 딱 맞는 환자가 내원하면 옳다구나 진행하는 것이다.

이날의 주인공은 외과 레지던트 1년차 선생님. 예고도 없이 찾아온 기회 아닌 기회 때문에 당황한 듯했다. 연차가 높은 레지던트 선생님들은 당황한 1년차 선생님을 붙잡고 충수돌기염 수술의 처음부터 끝까지를 다시 주지시키고 대비하고 있었다. 어안이 벙벙한 오늘의 주인공은 머릿속에서 수술의 전 과정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옆에서 다른 펠로우, 임상강사 선생님은 초집도를 기록으로 남겨주기 위해 사진을 찍었다.

다소 어수선한 가운데 환자를 준비하던 도중 외과 과장님이 수술실에 들어왔다. 훈훈한 전통의 자리였지만 혹여 분위기가 흐트러질까 약간의 긴장감이 수술실을 감돌았다.

그렇게 시작된 초집도는 20대, 이제 갓 외과의사로 첫발을 내딛은 선생님과 지난 세월 수천 건의 수술을 하고 그 분야의 대가라 불리는 50대 후반의 교수님이 서 있었다. 그리고 2명의 어시스트로 치프 레지던트와 스크럽 간호사가 있었다.

"자, 이제 시작하자. ○○○선생. 먼저 같이 스크럽 서는 어시스트 선생님들께 인사하고."
"안녕하세요. 오늘 수술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옆에 스크럽 간호사에게도 인사하고."
"안녕하세요."
"마지막으로 마취과 선생님께 인사드리고."
"마취과 선생님, 잘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이제 수술 시작하겠다고 하면 되는 거야."
"수술 시작하겠습니다."

평상시 수술실에서는 바빠서 잘 하지 않는 기본 인사 예절들이었다. 마치 선생님이 교실에 들어오면 반장이 일어나 인사시키듯, 인사 예절에 대해서도 전수받는 자리였다.

서젼으로 평생의 첫걸음을 내딛는 레지던트에게는 큰 의미이자 추억이 될 것이니 옆에서 다른 선생님들이 동영상과 사진을 찍으면서 진행되었다.

누구에게나 처음은 미숙하듯 혹여 교수님께서 답답해 하거나 화낼지도 모른다는 걱정과 달리 수술은 무사히 마무리되었다.

집도의가 서는 그 위치에 처음으로 서게 되면 기분이 어떨까. 그런 상황에서 주눅 들지 않고 자신감을 갖을 수 있다면 서젼으로 담력을 키울 기회가 되지 않을까. 사자가 자기 새끼를 절벽으로 밀쳐버리듯 강인한 애정이 담긴 자리로 느껴졌다.

한번은 어느 젊은 교수님이 서젼에게 있어 수술의 의미가 무엇인지 말씀해주신 적이 있다. 모든 의사들은 자신이 치료한 환자에게 책임이 있지만 그것이 단지 도덕적이나 법적인 책임만은 아니라고 했다.

"네가 환자 몸에 칼을 댔으면, 그 사실만으로도 그 환자는 너를 평생 따라가게 되는 거야. 봐라. 암 환자 수술하고 나면 교수님들 외래로 5년이고 10년이고 찾아오지? 그리고 그렇게 수술해서 환자가 잘 회복되면 의사로서 당연한 것임에도 뿌듯한 것이고. 혹시라도 수술하고 나서 환자가 안 좋아지면 걱정 때문에 밤에 잠도 잘 안 와. 외과의사에게 수술은 그런 거야."

초집도의 가르침 과정을 보면서 서 있던 1년차 선생님은 훗날 '나 초집도 때는…'이라 말하면서 추억하거나 후배들에게 이야기할 때가 올 것이다.

나 또한 초집도 날이 되었을 때, 당시 찍혔던 여러 사진을 보며 생생하게 기억하길 바라는 의미에서 정성들여 사진을 찍었다. 나중에 내게도 그런 자리가 주어지면 어느 인턴 선생님이 열심히 찍어준 사진으로 추억이 되리라 믿으면서.

[46]편으로 이어집니다.

※본문에 나오는 '서젼(surgeon, 외과의)'을 비롯한 기타 의학 용어들은 현장감을 살리기 위해 실제 에이티피컬 병원에서 사용되는 외래어 발음 그대로 사용했습니다.
이 글은 박성우 의사의 저서 '인턴노트'에서 발췌했으며 해당 도서에서 전문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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