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dicalTimes
  • 오피니언
  • 젊은의사칼럼

인턴 이첨지 선생의 '운수 좋은 날'

박성우
발행날짜: 2016-08-23 05:00:04

인턴의사의 좌충우돌 생존기…박성우의 '인턴노트'[48]

운수 좋은 날

(이 글은 인턴 중 일복이 가장 많다는 내공 이첨지 선생의 글로, 비루한 우리 인턴의 하루를 담백하고 토속적인 문체로 담아 문학성이 뛰어난 선생의 허락을 받고 옮긴다.
몇몇 필요한 부분은 주석을 달아 이해를 도왔다.)


새침하게 흐린 품이 비가 올 듯하더니 비는 아니 오고 날이 흐리기만 하였다. 이 날이야말로 종합병원에서 인턴 노릇하는 이 첨지에게는 오래간만에 닥친 운수 좋은 날이었다. 평소 두 건씩 잡혀있던 뇌동맥류 수술이 하나도 없는 것을 비롯 전체 신경외과의 수술이 아홉 건밖에 되지 않는 멋진 날이다.

그리 흔치 않은 날이다. 그야말로 재수가 옴 붙어서 며칠 동안 늦은 밤 까지 끝나지 않는 수술의 연속이었던 '역신'(이 첨지는 과거 병동에만 나타났다 하면 세균배양 검사가 줄지어 생겨나, 병동에 역병을 일으킬 정도의 내공이라 하여 역신이라 불리었다.) 같은 내공의 이 첨지는, 목요일 수술 일정을 볼제 거의 눈물을 흘릴 만큼 기뻤었다. 오전 시간에 조금 쉴 수도 있거니와 그보다 우울해하는 여자친구에게 아메리카노 한 그릇 사다 줄 수 있음이다.

정오 무렵, 병동에서 일이 있다고 도와 달란다. 첫째 번에 채혈 검사 하나, 둘째 번에 동의서 하나. 병동에도 일이 별로 없어 콜을 받고 달려가는 이 첨지의 다리는 이상하게 가뿐하였다. 달음질이 나는 듯하였다. 정규 시간이 지나고 중환자실 당직을 서는 시간이다. 평소에도 간간이 오던 콜이 저녁 시간이 훨씬 지나서도 울릴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흐린 하늘은 어두침침한 게 벌써 황혼에 가까운 듯하다. 한 걸음 두 걸음 기숙사에 가까워져 올수록 그의 마음조차 괴상하게 누그러졌다.

그런데 이 누그러움은 안심에서 오는 게 아니요, 자기를 덮친 무서운 불행을 빈틈없이 알게 될 때가 박두한 것을 예감한 마음에서 오는 것이다. 그는 불행이 닥치기 전 시간을 얼마쯤이라도 늘리려고 버르적거렸다.

기적에 가까운 신경외과 당직 인턴의 하루를 보내고 있다는 기쁨을 할 수 있으면 오래 지니고 싶었다. 마침 후배가 실기시험 차 서울에 왔다가 잠시 병원을 방문했다.

그는 우글우글 통통한 얼굴에 풍채가 좋거늘, 허여멀건 얼굴에 바짝 말라서 여기저기 버짐이 패이고 정리 안된 수염이 다닥다닥 난 이 첨지의 풍채하고는 기이한 대상을 짓고 있었다.

"여보게 이 첨지, 자네 당직이라면서 콜도 없이 놀고 있구먼. 시간도 많을 테니 한 잔 빨리게."

그 목소리는 몸짓과 딴판으로 연하고 싹싹하였다. 이 첨지는 친구를 만난 게 어찌나 반가운지. 그래도 후배가 서울 왔다고 얼굴이라도 보고 간다는데 기분이 좋아 마취과 인턴 최 첨지를 불러내 동관으로 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셋이서 소세지 3개와 음료 3개를 청하였고 순식간에 물같이 들이켜고 말았다.

시간이 흐르기 시작하여 30분, 1시간, 2시간이 다 되어 간다. 마취과 인턴 최 첨지는 의아한 듯 이 첨지를 보며 "여보게, 우리가 벌써 2시간이 다 되어가네. 자네 내과 지원했다더니 공부는 하지 않아도 되겠는가"라며 주의시켰다.

"아따, 2시간이 그리 아까웁냐. 내가 오늘 콜이 하나도 없었어. 참 오늘 운수가 좋았느니."
"그럼 얼마나 쉬었단 말인가?"
"거의 하루 종일이여, 하루 종일! 괜찮다, 괜찮다. 막 놀아도 상관이 없어. 오늘 전공 책을 얼마나 많이 봤는데."
"어허, 이 사람. 그런 말은 말게, 그런 말은 하는 것 아니라네."
"괜찮대도! 콜이 오기는 왜와!"라며 이 첨지는 득의가 양양했다.

12시가 되어가자 피곤하기도 하고 후배를 재워야겠다는 생각에 이 첨지는 자리를 파해야겠다며 이야기를 마무리하려 했다. 그때 가운데 주머니에서 콜폰이 울렸다.

아아, 수술장 당직 인턴이다. 밤늦게 수술이 생기면 이 첨지가 들어가기로 되어 있는 터라 동관 1층 마당에는 무시무시한 정적이 흘렀다. 다만 이 무덤 같은 침묵을 깨뜨리는 콜폰의 진동소리만 들릴 뿐이다.

이 첨지는 용기를 내 전화를 왈칵 받는다. "이 시간에 웬일로 전화냐?"라고 퉁명스레 받는 것이 수상하다. 이것이야말로 제 몸을 엄습해오는 무시무시한 증을 쫓아버리려는 허장성세인 까닭이다.

"응급 수술 떴대. 모야모야(모야모야 병moyamoya disease: 신경외과적 질환) 수술 후 블리딩(bleeding: 수술 후 합병증으로 출혈 소견이 있을 시를 지칭)이 있나 봐. 45분까지 준비하래."

힘없이 전화를 끊고 "이 밤중에 수술! 응급 수술! 왜 수술을 한 번에 잘하지 못하고 피가 나느냐, 응. 왜 하필 이 밤중에" 하는 말끝엔 목이 메었다.

그러자 수술실에 들어갈 인턴 이 첨지의 눈에서 떨어진 닭똥 같은 눈물이 소세지 껍데기가 널려 있는 나무 탁자 위를 어른어른 적시었다. 이 첨지는 고개를 가운 속에 파묻고 비비대며 중얼거렸다.

"오프 같은 당직을 서고 있는데 왜 밤중에 쉬지를 못하니, 왜 자지를 못하니. 괴상하게도 오늘은 운수가 좋더니만."

[49]편으로 이어집니다.

※본문에 나오는 '서젼(surgeon, 외과의)'을 비롯한 기타 의학 용어들은 현장감을 살리기 위해 실제 에이티피컬 병원에서 사용되는 외래어 발음 그대로 사용했습니다.
이 글은 박성우 의사의 저서 '인턴노트'에서 발췌했으며 해당 도서에서 전문을 볼 수 있습니다.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