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중 열한 달이 지났고 열두 달째가 되었다. 새해는 바뀐 지 오래였지만 근무 시작은 3월부터였고 2월이 인턴으로서의 마지막 달이었다. 2월은 여러모로 인턴의 운명에 따라 변동이 많은 달이다. 이미 각 과의 신입 전공의들은 12월에 합격 여부가 결정돼 이듬해 2월에는 해당과 인턴을 돌면서 동시에 3월부터 시작하는 전공의 업무를 배우면서 지내게 된다.
'픽스턴.' 고정되었다는 영어 '픽스(fix)'와 인턴의 어미인 '~턴'을 붙여 만든 '픽스턴(fix-tern)' 일정이다. 그래서 픽스턴은 '말턴'이 다시 '초턴'이 되는 달이다.
나 역시 마지막 2월은 자연스레 성형외과 픽스턴이 되었다. 앞으로 4년을 함께 할 다른 2명의 동기와 함께 도는 2월은 말 그대로 '지옥'이었다. 안 그래도 성형외과 인턴인데 거기에 더해 전공의 업무도 배워야 했다.
다른 말턴들, 군대를 가는 인턴이나 내년이 휴식 계획으로 가득 찬 인턴 혹은 미리 픽스턴을 돌지 않아도 되는 과의 인턴들은 2월을 여유롭게 보내고 있었다. 인턴으로서 원숙함에 다다른 술기와 적당한 꼼수로 말턴의 아우라를 풍기고 있었다. 오프도 없이 병원에 갇혀 있는 우리로서는 상대적 박탈감이 컸다.
성형외과 의사는 상처 하나는 누가 봐도 잘 꼬맬 수 있어야 한다. 얼마나 예쁘고 깔끔하게 봉합하는가는 전적으로 서젼의 손에 달려 있었다. 그리고 봉합만큼은 다른 서젼이 인정할 정도로 잘해야 한다. 기본이 이루어진 후에 미세혈관문합술이라 하여 직경이 1밀리미터도 안 되는 혈관을 문합할 수도 있고 다른 섬세한 수술도 해낼 수 있다.
다른 외과 계열은 복강경 수술이나 로봇 수술 등이 인기를 얻지만 성형외과는 전적으로 서젼의 손 끝에서 시작과 끝이 이루어지는 영역이라는 인식이 강하다.
다른 외과와 달리 쓰이는 봉합사의 크기와 굵기가 모두 작고 얇다. 그래서 손수 봉합을 매듭짓는 타이보다 기구를 이용하는 '기계 타이' 방법이 주를 이룬다. 머리카락 굵기 만한 실은 잡기도 어려울 뿐더러 손으로 조작하면 쉽게 끊어진다.
나는 픽스턴으로 짬이 나는 주말에 봉합 연습을 했다. 선배들이 물려준 기구로 0.07밀리미터 직경의 6-0 나일론 봉합사를 이용해 드레싱 물품에 한 땀씩 손을 단련했다. 언젠가는 교수님처럼 기계가 하듯 일정하고 정교한 봉합을 할 수 있으리라 목표를 삼고 연습했다.
성형외과 인턴으로 임했던 날보다 이제는 가족이라는 생각에 불안감도 덜했다. 평생 해야 하는 나의 천직이라 생각하며 힘든 생활도 배움이라 여기는 마음이었다. 병원을 돌아다니면서 마주치는 동기들은 속 편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인턴끼리 서로 당직을 몰아주기를 해 자체적으로 휴가를 다녀왔다는 등 부러운 말들을 했다. 떨턴 동기들도 처음의 충격에서 벗어난 듯 마지막 인턴 일정을 즐기고 있었다.
비임상과가 인기다. 하지만 힘든 일상에서 마음의 위로를 주는 것은 미래에 얻을 보상에 대한 기대가 아니다. 우리의 처지를 알아주는 환자에게서 위로를 받는다.
고요한 새벽, 훗날 후배 의사들이 전공을 선택할 때 보상이나 근무조건보다 자신의 적성을 더 고려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
[61]편으로 이어집니다.
※본문에 나오는 '서젼(surgeon, 외과의)'을 비롯한 기타 의학 용어들은 현장감을 살리기 위해 실제 에이티피컬 병원에서 사용되는 외래어 발음 그대로 사용했습니다.
이 글은 박성우 의사의 저서 '인턴노트'에서 발췌했으며 해당 도서에서 전문을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