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칙이나 규정에 의하여 일정한 한도를 정하거나 정한 한도를 넘지 못하게 막음’
국어사전에서 살펴본 ‘규제’의 정의다.
규제는 ‘금지와 처벌’이 아닌 일정 수준 이상을 정하고 그 기준을 벗어나지 말아야 한다는 ‘제한의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이 해석이 가능한 이유는 규제를 의미하는 영어 ‘Regulation’에서 찾을 수 있다.
의료기기업체 제품 인허가 담당부서를 RA(Regulatory Affair)로 부른다.
즉, 규정을 다루는 부서라는 뜻이다.
Regulate는 일정하게 조절한다는 의미다.
자동차 부품 중 Regulator가 전기를 발생시켜 일정하게 내보내는 기능을 하는 것처럼 규제는 일정한 수준을 유지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규제는 특히 의료기기산업에 밀접한 영향을 미친다. 의료기기를 ‘규제산업’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의료기기업계는 오래 전부터 ‘착한 규제·나쁜 규제’를 놓고 갑론을박을 벌여왔다.
하지만 이를 명확히 구분할 수 있는 답은 아직 찾지 못했다. 당연한 일이다.
의료기기 관련 이해당사자인 의사, 의료기기업체, 환자, 정부 모두에게 득(得)이 되는 착한 규제가 있을까.
반대로 이들에게 실(失)만 되는 나쁜 규제 역시 존재할 수 있을까.
누군가에게는 도움이 되는 착한 규제가 한편으로는 피해를 주는 나쁜 규제가 될 수 있다.
규제에 있어 ‘절대선·절대악’은 존재할 수 없다.
월간의료기기규제연구회는 이러한 착한 규제·나쁜 규제의 양면성을 탐구하고, 나아가 사람 중심의 합리적 규제가 무엇인지 연구하는 의료기기업체 종사자들의 공부방 모임으로 업계에 신선한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의료기기 다국적기업·수입사·제조사 팀장·부서장급 10~12명이 참여하는 규제연구회는 지난 2월부터 매월 둘째 주 금요일 오후 6시에 모여 공부방 모임을 시작했다.
멤버 대부분은 RA 전문가들이며 보험·마케팅 담당자도 참여하고 있다.
회사 RA 업무만으로도 지겨울 법 하건만 이들은 왜 규제연구회를 만들었을까?
규제연구회 동방의료기 이진휴 이사는 “그간 RA 담당자들은 의료기기법에 근거한 규제 자체에 얽매여 실무적인 업무만 해왔다”고 말했다.
이어 “규제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존재한다”며 “규제가 왜 만들어졌는지 그 원리·원칙을 공부하고 어떤 규제가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지 함께 고민하고자 규제연구회를 만들게 됐다”고 설명했다.
공부방 모임은 지정된 발제자가 30분간 주제발표를 하고 이어 1시간 30분 정도 토론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토론은 단순 규제 해석에서 벗어나 적용사례를 중심으로 명확성 공정성 보편성 유연성 등 다양한 관점에서의 자유로운 의견개진이 이뤄진다.
실제로 지난 3월 공부방 모임은 1형 소아당뇨 환아 부모의 연속혈당측정기 수입에 대한 의료기기법 적용을 놓고 착한 규제·나쁜 규제였는지 여부를 따지는 토론이 벌어졌다.
토론에서는 엇갈린 주장이 팽팽하게 맞섰다.
규제 당국이 의료기기법 위반 행위에 대해 공정성·보편성에 입각한 법 규정을 적용했다는 입장과 아이의 아픔을 덜어주고자 선의로 한 행위를 법의 잣대로만 처벌한 것은 적절하지 않았다는 의견이 대립한 것.
이진휴 이사는 “해당 주제를 놓고 난상토론이 벌어졌지만 그렇다고 답을 찾고자하지도 않았다”고 밝혔다.
그는 “다만 다양한 사람들의 의견을 모으고 착한 규제·나쁜 규제를 떠나 합리적인 규제가 무엇인지 모색하는 과정이 더 큰 의미와 가치가 있었다”고 덧붙였다.
이날 공부방 모임은 미국의 파킨슨병 환자 사례를 중심으로 적절한 규제 방향을 모색했다.
환자는 안전성을 검증 받은 모든 약을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상태가 호전되지 않았다.
그러던 중 특정 약이 파킨슨병에 효과가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발견하고 그 약을 시도하기로 했다.
문제는 해당 약이 FDA 허가를 받지 않았다는 점.
약물효과를 보인 환자가 20%에 불과해 치료 유의성 최소기준을 충족하지 못한 결과다.
하지만 환자 입장에서는 20% 치료효과에도 희망을 가질 수밖에 없을 터.
만약 이 환자가 허가 받지 않은 약을 불법 구입해 복용했다면 그 약을 제공한 사람도 함께 처벌받는 게 당연하다.
이 사안에 대해 규제 당국은 어떻게 조치했을까?
FDA는 환자가 허가 받지 않은 약을 사용하겠다고 했을 때 이를 위한 절차에 돌입했고 추후 사용허가를 내줬다.
허가 전 규제 당국 역할은 안전성 담보가 아니라 부작용 설명에 주력했다.
즉, 환자가 다른 선택은 없는지 확인하고 환자·가족에게 예상되는 부정적인 결과를 설명했다.
또 약의 특성을 파악해 부작용을 최소화할 수 있는 투여 방법을 의료진과 함께 설계했다.
이후 투약 전 시험을 거쳐 마지막으로 환자 선택을 존중해 의료진과 협의해 최종 투약을 결정했다.
이 사례에서 주목할 점은 규제 당국이 제도상의 최선을 다한 동시에 규제 강도를 낮춰 환자 중심의 적절한 조치를 취했다는 것이다.
물론 이 과정에서 고발을 당하거나 처벌받은 사람도 없다.
이진휴 이사는 “착한 규제·나쁜 규제에 대한 정의에 앞서 더 중요한 점은 결국 사회적 합의를 통해 환자 접근성을 높이고 국민 눈높이에 맞는 합리적 규제를 적용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월간의료기기규제연구회는 규제과학은 물론 인문학적 관점에서 사람 중심 규제가 무엇인지 연구하고 또 적절한 규제를 위한 사회적 합의과정에서 가치중립적인 의견을 제시해 규제 당국의 정책 수립에도 일조해 나가겠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