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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아내를 살려주세요. 면역항암제를 쓰게 해주세요"

손의식
발행날짜: 2018-05-25 06:00:58

말기암 아내 위해 국민청원·지하철 피켓까지 "인간 기본권 지키고 싶다"

평소와 다름없는 퇴근길 서울 지하철 2호선. 문이 열리고 목에 피켓을 맨 남자가 올라 탔다.

남자는 지하철 통로 한 가운데 서서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곧 입을 열었다.

"저는 잡상인도 아니고 종교인도 아닙니다."

쉰 목소리가 들리자 각자의 핸드폰에 고정돼 있던 얼굴들이 남자를 향했다. 안경을 썼고, 머리는 약간 헝클어졌다. 남자의 목에 맨 피켓도 눈에 들어왔다.

피켓의 내용은 '말기암 면역항암제 국민청원'. 피켓의 맨 위에는 청와대 국민 청원 웹 주소도 적혀 있었다.(https://www1.president.go.kr/petitions/212170/)

지하철에서 면역항암제 허용을 외치는 배 씨. 그의 아내는 유방암 4기다.
남자가 말을 이었다.

"제 아내는 현재 유방암 4기입니다. 쓸 수 있는 약이 없습니다. 마지막 희망은 면역항암제인데 심평원의 제재로 투여를 못하고 있습니다. 국민 청원에 동의해주시고 제 아내를 살려주세요. 제 아내와 말기암 환자들을 살려주세요."

말을 마친 남자는 다음 칸으로 향했다. 그리고 또 말했다. "저는 잡상인도 아니고 종교인도 아닙니다."

기자는 남자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신분을 밝히고 조심스럽게 인터뷰를 요청했다. 남자는 다음 역에서 내리자고 했다.

문이 열리고 기자는 남자와 내렸다. 지하철 역 한켠에 선 남자는 그제서야 목에 건 피켓을 잠시 내려놨다. 그리고 말을 꺼냈다.

남자의 성은 배 씨. 올해 41살이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제 나이보다 훨씬 들어보였고 지쳐 보였다.

배 씨는 아내와 10살, 6살 딸을 가진 평범한 직장인이다. 오늘 그는 방송국 앞, 국회의사당 앞, 헌법재판소 앞에서 피켓을 들었다. 지금은 지하철에 서 있다. 평일 직장에 있어야 할 그가 휴가를 내고 지하철에 있는 이유는 그의 아내를 위해서다.

"아까 지하철 안에서 들어셨겠지만 제 아내는 현재 유방암 4기입니다. 전이와 재발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잠시 생각에 잠긴 배 씨는 말을 이었다.

"제 아내에게는 더 이상 쓸 수 있는 약이 없습니다. 면역항암제가 유일합니다."

그러나 국내에서 면역항암제 사용이 허가된 암종은 비소세포폐암, 위 선암 및 위·식도 접합부 선암, 신장암, 방광암, 두경부암, 호지킨림프종, 흑색종 등 7개에 불과하다.

배 씨의 아내는 유방암. 면역항암제 사용이 허가되지 않은 암이다. 배 씨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일본에선 의사의 재량권으로 치료를 할 수 있는 것으로 알아요. 그래서 국내 많은 말기암 환자들이 일본으로 가고 있잖아요. 국내에서도 시급하게 도입해달라는 것이 청원의 요지에요."

허가초과 항암요법 사용제도에 대해서도 실효성이 떨어진다고 했다.

"정부는 빨리 처방을 받을 수 있도록 했다고 해요. 하지만 다학제위원회를 통과해야 하고 불승인이 나면 동일 요법 재신청도 불가능해요. 사실상 실효성이 없어요."

그나마 임상시험을 진행하려는 병원에 피험자 등록 정도가 희망이다. 그러나 이마저 대기자가 많아 쉽지 않다.

"어떤 병원에서 과감하게 임상을 하겠다는 경우가 가끔 있는데 워낙 말기암 환자가 많아 피험자가 되려고 해도 차례를 오랫동안 기다려야 해요."

"그런데 제 아내는 이미 전이가 진행되고 있어요. 임상 차례를 기다리는 동안 어떻게 될지 장담할 수 없는 절박한 상황이에요."

배 씨의 쉰 목소리가 점점 줄어들었다. 잠시 숨을 고른 그는 말을 이어갔다.

사회에서 아직은 작은 글자인 '면역항암제'를 더 많이 이야기 하고 많은 공감대를 얻어서 제도를 개선하고 싶다는 것이다. 국민청원도 그 일환이다.

"청원에 들어가보면 면역항암제 급여와 적응증 두가지를 요청하고 있어요. 내일(25일)이면 청원이 끝나는데 아직 8만명이 조금 안 돼요. 그래도 희망의 끊을 놓을 수 없어 지하철을 돌고 있어요."

"국민 청원 20만명을 채운다고 해도 정부에서 제도를 개선한다고 확실히 말할 순 없죠. 하지만 계속 이슈화가 되고 많은 사람들이 고민하고 많은 기관들이 고민해야 적절한 해결책이 나올 것이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그래서 계속 알리고 다니는 것입니다."

배 씨가 바라는 것은 하나다. 삶의 마지막에서 하루라도 더 붙들고 싶은, 인간이 가진 그 생명의 존엄성을 보건당국이 알아달라는 것이다.

"제도도 중요하고 약의 유효성도 중요하지요. 하지만 그걸 넘어서는 게 인간 생명의 존엄성 아닐까요. 기관의 입장은 알지만 그 존엄성에 대해 생각해줬으면 합니다."

"면역항암제를 투여한다고 해서 호전된다는 보장도 없고 오히려 악화되는 경우도 있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환자가 자기의 생명을 선택하는 것은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라고 생각해요. 보건당국에서도 긍정적으로 생각했으면 좋겠어요."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서는 기자의 소매를 잡는 배 씨. 얼굴과 이름은 가려달라는 요청이다. 혹시라도 아내에게 자신의 고생을 보이기 싫은 마음일 것이다.

기자와 헤어진 '배 씨'는 다시 지하철로 발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