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기 원장(56)이 개원 날짜를 정확히 기억하는 이유는 '1호 환자' 덕분이다. 그 환자는 개원 20년째인 현재까지도 이 원장을 찾고 있다.
20년 동안 한자리를 지키고 있다면 환자가 의원 한 곳을 정해놓고 계속 찾는 게 당연한 것 아닌가라고 속단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20년 전 피부질환으로 관악연세가정의원을 찾았던 30대의 1호 환자는 현재 경기도 의왕시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 사이 대전으로 이사까지 갔었다.
"당시 30대 초반의 여성 환자였는데 피부 관련 질환 때문에 찾았다. 대전으로 이사를 가서도 피부과 연고를 타기 위해 우리 의원에 왔다. 올 때는 항상 먹을 것을 손에 들고 온다. 당시 아이가 5세 정도였는데 이제 취직해 공무원이 됐다고 한다. 지금은 가족이 경기도 의왕시에 살고 있다."
이 원장은 1호 환자의 가족 이야기도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환자가 매번 찾을 때마다 전자차트에 환자와 나눈 대화 내용들을 잊지 않기 위해 입력한 덕분이다.
1호 환자처럼 지방으로 이사를 가서도 굳이 혈압약, 당뇨병약을 타기 위해 이 원장을 찾아오는 환자가 심심찮게 있다.
"원장님한테 이야기 듣는 게 더 편하다"며 천안, 청주, 강원도 등지에서 찾아온다. 덕분에 "가까운 동네의원 가세요"라는 말을 던져야 할 정도다, 실제로 그는 환자 한 명 한 명 진료에 비교적 시간을 많이 투자하는 편이다. 진료하는 데 평균 3~5분 정도의 시간이 걸리지만 환자가 왜 아픈지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하면 적극적으로 들으려고 한다.
"60~70대 환자는 아픈 이유를 설명하면서 사생활에서 스트레스받는 부분을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다. 층간 소음 때문에 잠을 못 자는데 이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까지 물을 정도다. 직접적인 해결을 해줄 수는 없지만 동의를 하며 듣는 것만으로도 환자에게는 큰 도움이 된다. 그렇게 하다 보면 10분은 훌쩍 지나가 있다."
환자의 입장을 먼저 생각하는 그의 자세는 환자에게도 전달된다. 최근에는 일가족이 이사를 간다며 "그동안 고마웠다"고 이 원장에게 감사 인사를 하러 왔다. 경기도 용인시로 이사를 간다고 한다.
2013년 열성경기를 일으킨 아이에게 응급처치를 했다가 온 가족과 인연을 맺었다. 할머니와 함께 은행에 갔던 아기가 발작하자 은행 직원이 옆 건물에 있던 이 원장 의원으로 뛰어들어왔다. 당시 아기는 돌이 갓 지난 상태였다.
이 원장은 아기를 안고 의원으로 돌아와 마사지를 하고 해열제를 주사했다. 이후 아기를 비롯해 아기의 부모, 할머니까지 이 원장을 찾기 시작했다. 말 그대로 가족 주치의가 된 것. 경련을 일으켰던 아기는 이제 여섯 살이 됐다.
"아이의 이름을 차트에 입력하면 가족의 이름과 건강 상황을 모두 확인할 수 있다. 진료차트를 가족별로 정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야 한 사람이 아닌 한 가족의 건강을 책임지는 주치의로서 역할을 잘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이처럼 환자가 오랫동안 이 원장만 찾는 이유에 대해 그는 '초심' 때문이라고 했다. 초심을 잃지 말자는 단순한 말은 그의 좌우명이기도 하다. 초심을 되새기기 위해 진료실 책상 옆벽에는 그가 존경하는 윤방부 교수와 함께 찍은 사진이 걸려있다.
"개원 초기에는 누구든지 열심히 하려고 한다. 시간이 흘러 현재에 익숙해지면 나태해지기 쉽고, 소홀해지기 쉽다. 가능하면 초심을 잃지 않고, 환자의 환자의 입장에서 생각하려고 한다. 의원의 성패를 가르는 요소 중 병원 위치도 있고, 운도 있지만 의사의 성향이 첫째다. "
20년째 한자리를 지키며 동네의사로서 역할을 하고 있는 이인기 원장이 생각하는 '주치의'의 개념은 뭘까.
"포괄적인 진료, 통합진료를 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나라는 의원급에서 사실상 진료과의 구분이 없어졌기 때문에 포괄적인 진료를 가정의학과에만 해야 한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모르는 분야니 다른 진료과 가세요라고 하기보다는 다양한 경증질환자를 1차 의료기관에서 진료하고, 보다 전문적인 치료가 필요하면 전원할 수 있는 판단력이 필요하다."
이 원장은 환자에게 누구보다 가까이 있는 '동네의사'이지만 환자와 의사의 관계는 너무 가까워서도, 너무 멀어서도 안된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적절한' 신비주의를 추구하고 있다.
"진료실을 벗어나 동네 모임 등을 통해 개인적으로 만나고 하다 보면 실수를 할 수도 있다. 밖에서도 환자가 먼저 알아보고 말을 걸 때도 있는데 기억이 나지 않아 당황스러운 상황을 겪은 적도 있다. 개인적 일상을 공유하는 것은 선을 그으려고 하고 있다. 그래서 점심도 도시락을 싸와서 의원 안에서 가급적 해결하려고 한다."
초등학생일 때부터 의사가 되고 싶다는 외길 꿈만 꿔온 터라 의사라는 직업이 너무 행복하다는 이인기 원장.
"의사 외에는 다른 직업을 가진다는 것을 생각해본 적이 없다. 개원의사에게는 은퇴라는 말이 없다. 체력이 힘들 때도 있지만 지금이 너무 행복하고 좋다. 환자가 기억해주고 찾아와주면 흐뭇하고 보람차다. 체력이 허락하는 날까지 의사는 계속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