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2월 16일 미국 ABC 방송 퀴즈쇼 ‘제퍼디!’(Jeopardy!).
인공지능 슈퍼컴퓨터는 이 퀴즈쇼 사상 최대 상금 우승자 브래드 루터(Brad Rutter)와 74회 연속 우승을 차지한 켄 제닝스(Ken Jennings)와의 대결에서 압도적 차이로 승리한다.
인간에게 패배를 안긴 IBM 인공지능 슈퍼컴퓨터 ‘왓슨’(Watson)의 등장은 도래할 4차 산업혁명 ‘인공지능(AI)·빅데이터’ 시대를 예고했다.
예고는 의료계에서 먼저 현실화됐다.
국내 최초로 인공지능 ‘왓슨 포 온콜로지’(Watson for Oncology)를 도입한 가천대 길병원은 2016년 12월 5일 ‘IBM 왓슨 인공지능 암센터’를 통해 왓슨을 실제 의료현장에 적용했다.
이는 인공지능·빅데이터 기반의 진료·임상뿐 아니라 유전체·생활습관정보 등을 통합·분석해 환자 개별 특성에 맞춘 ‘정밀의료’(Precision Medicine)의 서막을 알린 셈이다.
왓슨은 2016년 길병원을 시작으로 2017년 ▲부산대병원 ▲대구가톨릭대병원 ▲계명대동산병원 ▲건양대병원 ▲조선대병원 ▲전남대병원 ▲중앙보훈병원이 연이어 도입했다.
하지만 왓슨 열풍이 갑자기 식은 것일까. 올해 아직까지 도입병원 소식은 들리지 않고 있다.
서울대·서울아산·삼성서울 등 ‘Big 5’ 병원들 역시 여전히 왓슨에 별다른 관심이 없는 듯하다.
의료계 일각에서는 왓슨이 병원 홍보마케팅 수단으로 반짝했을 뿐 실제 의료현장에서 암을 비롯한 진단 실효성이 떨어져 병원들의 관심 또한 빠르게 식었다는 분석이다.
게다가 미국·유럽 환자와 논문을 주로 학습한 왓슨이 아시아지역 환자에게는 적합하지 않다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서양인과 동양인에게 발병하는 암 등 질병 양상이 달라 한국 환자에게 적용하기엔 진단 정확도가 떨어진다는 주장이다.
한국형 인공지능(AI) 의사 ‘닥터 앤서’(Dr. Answer) 개발은 바로 이 지점에서 출발했다.
닥터 앤서는 인공지능이 환자 진단정보·의료영상·유전체정보·생활패턴 등 다양한 빅데이터를 활용·연계·분석해 개인 맞춤형 질병 예측·진단·치료를 지원하는 한국형 정밀의료서비스.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이를 위해 2018년부터 3년간 357억원(정부 280억원·민간 77억원)을 투입해 유방암 대장암 전립선암 심뇌혈관질환 심장질환 등 8개 질환에 대한 인공지능 의료소프트웨어(SW)를 개발한다는 목표다.
사업에는 사업총괄기관인 서울아산병원의 한국데이터 중심의료사업단(K-DaSH)을 중심으로 25개 의료기관·19개 ICT·SW기업이 참여하고 있다.
닥터 앤서는 또한 국내 최초로 클라우드 기반으로 개발 중인 ‘정밀의료 병원정보시스템’(P-HIS)과 연계해 한국형 정밀의료서비스를 제공하게 된다.
서울아산병원 아산생명과학연구원 김종재(병리과 교수) 원장은 닥터 앤서 개발사업 총괄책임자로 첫 한국형 AI 의사의 산파 역할을 하고 있다.
“서양과 동양인은 유전적 환경적 요인으로 병의 양태가 다르다. 위암·간암만 보더라도 북미지역과 한국의 발병 양상이 다르다. 한국인에 대한 정밀의료서비스는 한국인들의 데이터를 기반으로 시스템 연구개발이 이뤄지고 실용화해야한다.”
김 원장이 밝힌 한국형 인공지능 정밀의료시스템 닥터 앤서(Dr. Answer·Ai, network, software, er) 개발 배경이다.
왓슨과 닥터 앤서는 인공지능·빅데이터·기계학습을 기반으로 정밀의료서비스를 실현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렇다면 둘은 어떻게 다를까? 차이점은 ‘의료영상 데이터’에 있다.
김종재 원장은 “왓슨 포 온콜로지·왓슨 포 지노믹스(Watson for Genomics)와 닥터 앤서는 큰 틀에서 인공지능을 활용하고 정밀의료를 추구하는 공통점이 있다”고 평가했다.
이어 “왓슨은 환자 정보와 여러 연구결과 정보들을 통합·분석해 치료 플랜을 제시하지만 아직까지 의료영상 분석진단 툴을 제공하지는 않는다”고 설명했다.
반면 “닥터 앤서에는 환자의 질병 예측·진단·예후관리 과정에 활용할 수 있는 의료영상 데이터 기반 소프트웨어(SW)를 포함하고 있다”고 밝혔다.
또 다른 궁금증. 닥터 앤서의 의료영상 데이터 기반 SW 접목은 왜 중요할까?
김 원장은 영상의학과·병리과 사례로 그 이유를 설명했다.
그는 “닥터 앤서는 방대한 흉부 X-ray 영상을 딥 러닝(Deep Learning), 즉 기계학습을 통한 빅데이터로 축적해 환자가 폐암인지 결핵인지 신속하게 스크리닝 함으로써 영상의학과 의사가 이를 참고해 판독 시 오진 확률을 줄일 수 있다”고 말했다.
또 “병리과 역시 암 여부는 물론 암의 조직학적 특성 파악을 위해 현미경으로 일일이 들여다봐야한다”며 “의료영상 데이터 기반 SW는 현미경으로 획득한 이미지를 신속히 분석해 병리의사가 정확하고 빠른 진단을 내리는데 보조적인 역할을 한다”고 덧붙였다.
그는 “닥터 앤서 개발에서 중요한 부분은 양질의 의료영상 데이터 확보에 있다”며 “25개 의료기관들은 3~5개 병원들이 그룹을 이뤄 특정질환에 대한 질 높은 의료영상 데이터를 집적하고 이를 기반으로 기업이 인공지능형 소프트웨어를 개발하게 된다”고 소개했다.
닥터 앤서 개발은 의사의 신속하고 정밀한 진단을 보조하고 인공지능을 활용한 개인 맞춤형 정밀의료시대를 연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하지만 넘어야 할 장벽 또한 만만치 않다.
엄격해지는 환자 개인정보보호 이슈를 비롯해 식약처 인허가·심평원 급여등재 여부가 향후 닥터 앤서 상용화에 필수적인 요소이기 때문.
김종재 원장은 “닥터 앤서는 많은 의료기관과 기업들이 참여하는 국가 차원의 대규모 개발사업으로 향후 상용화·산업화가 매우 중요하다”며 “개발 이후 개인정보보호·의료기기 인허가·수가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느냐가 관건”이라고 강조했다.
개인정보보호의 경우 현재 닥터 앤서 개발을 위해 집적되는 데이터는 병원별 임상시험심사위원회(IRB) 심의를 통해 환자 개인정보에 대한 엄격한 비식별 조치를 수행하고, 데이터 수집·분석·활용·폐기 각 단계별로 보안체계를 적용해 현재로서는 큰 문제가 없는 상황.
그는 “개인정보의 보호와 활용을 조율하는 규정을 만들기 위해 현재 사업단에도 관련 전문가들이 참여하고 있으며 정부와도 협의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특히 “닥터 앤서 상용화를 위해서는 제품 개발에 참여한 기업들의 지속적인 생존이 가능해야 한다”며 “개발 후 신속하게 의료기기 인허가를 내주고 또 급여화가 될 수 있도록 정부의 협조와 지원이 필요하다”고 주문했다.
김종재 원장은 닥터 앤서가 성공적으로 개발되면 왓슨과의 경쟁은 물론 아시아를 비롯한 글로벌시장 수출도 충분히 가능하다고 내다봤다.
그는 “우리나라는 ICT기업들의 기술 수준이 높고 인재들도 많다”며 “닥터 앤서 개발에 참여하고 있는 뷰노·루닛 같은 기업만 보더라도 탁월한 영상처리 솔루션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더불어 “전 국민 건강보험체계와 질 좋은 의료데이터를 활용할 수 있는 인프라, 세계적인 영상의학과 수준을 고려할 때 정부가 관심을 갖고 지원해 준다면 기대 이상의 성공적인 한국형 정밀의료시스템 닥터 앤서 개발은 충분히 가능하다”고 자신했다.
그러면서 “아시아뿐만 아니라 왓슨이 한국에 들어와 있듯이 우리 또한 한국형 AI 의사를 미국에 수출하지 말라는 법이 없다”면서 “닥터 앤서의 인공지능 기반 소프트웨어 성능이 훌륭하다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고, 또 그렇게 돼야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