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은 지난해 7월 19일 분당서울대병원 헬스케어혁신파크 방문 현장에서 의료기기 규제혁신을 천명했다.
융·복합 혁신의료기기 신속한 출시를 비롯해 의료기기 인허가 간소화·체외진단기기 선진입·후평가 등 규제완화를 견인하는 구체적인 방안도 제시했다.
의료기기업계는 그야말로 꽃길만 걸을 줄 알았다.
낡고 불합리한 관행과 규제 혁파는 지속가능한 비즈니스 환경을 조성하고, 의료기기산업의 양적 질적 성장과 발전을 이끌어 낼 것이라는 기대감에서다.
하지만 업계는 정부 의료기기 규제혁신 발표 이후 오히려 규제가 강화되고 있다고 말한다.
의료기기업체들의 시장진입은 더 까다로워지고 비용부담은 커지는 등 ‘가시밭길’을 걷고 있다는 아우성도 나오고 있다.
업계가 지난 15일 코엑스에서 청와대 사회수석실과 비공개 간담회를 가진 이유다.
간담회를 주도적으로 준비한 이진휴 의료기기규제연구회 위원은 “의료기기업계가 처한 현실적인 어려움을 알려 이를 해결할 제도개선과 정책 마련을 청와대 사회수석실에 건의하고자 자리를 마련했다”고 개최 배경을 설명했다.
그는 “업계가 건의한 의료기기 규제완화는 희소·희귀질환 환자의 원활한 의료기기 공급과 경제적 부담을 낮추는 것은 물론 창업 및 중소의료기기제조사들의 차등 지원을 통한 선별적 규제 장벽 해소에도 초점을 맞췄다”고 강조했다.
이날 간담회에는 김연명 청와대 사회수석을 비롯해 복지부·식약처, 한국의료기기공업협동조합·한국의료기기산업협회, 의료기기제조·다국적기업 대표, 의료기기규제연구회 등 약 30명이 참석했다.
업계는 이 자리에서 6가지 제도개선안을 건의했다.
주요 내용을 살펴보면, 개인이 희귀병 등 치료목적으로 국내 유통되지 않는 의료기기를 직접 수입할 때 정해져있는 급여범위 내 일부 보험수가를 청구하면 급여를 통해 환자 비용부담을 줄여줄 수 있는 제도 마련을 건의했다.
또 한국보건의료연구원(NECA)이 신의료기술평가 시 ‘후평가’ 근거를 직접 수집·작성해 의료기기업체들의 임상시험 부담과 비용을 경감시켜 줄 것으로 제안했다.
이에 대해 김연명 사회수석은 “후평가 시 임상근거 입증 책임을 업체가 아닌 평가기관인 NECA에 부여하는 것은 평가절차 자체가 변하기 때문에 상당히 어려운 문제다. 다른 대안과 함께 고민해 보겠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의료기기 인허가·시험검사비용을 업체별 차등 적용하는 제도개선안도 포함됐다.
의료기기업계는 의료기기 안전성·유효성 확보를 위한 각종 시험검사비용이 업체에 큰 부담이 되고 있다고 어려움을 토로했다.
실례로 비임상시험관리기준(GLP) 인증에 필요한 일부 시험검사비용은 최근 2배 이상 증가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를 고려해 정부 지원 또는 산업계 기금 조성을 통해 일정 매출 규모 이하 업체에 대해서는 수수료를 차등 적용하는 제도 마련이 시급하다는 게 업계 목소리다.
업계는 특히 ‘의료기기 임상자료 제출 의무화제도’에 대한 근본적이고 전향적인 재검토를 요청했다.
기존에는 후발업체 제품이 이미 시장에서 허가받은 제품과 비교해 구조·원리 등 ‘본질적 동등성’을 입증하면 안전성·유효성을 확보한 기존 기술로 인정해 허가과정에서 임상자료 제출을 면제받았다.
하지만 본질적 동등성 인정은 지난해 식약처 국정감사에서 문제점으로 지적됐다.
최초 개발업체는 제품 허가 시 많은 비용과 시간을 투자해 허가를 받는 반면 후발업체의 경우 최초업체 정보를 통해 상대적으로 쉽게 허가를 받고 있다는 역차별 이슈가 제기된 것.
이에 식약처는 고시 개정을 통해 인체 삽입형 의료기기의 임상자료 제출 의무화 시행을 앞두고 있다.
업계는 임상자료 제출 의무화가 다국적기업 제품과의 본질적 동등성을 입증해 제품을 개발·출시하고 있는 국내 의료기기제조사에게 높은 진입 장벽이 될 것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임상자료 제출 의무화제도에 대한 근본적인 재검토와 함께 임상을 대체할 수 있는 리얼 월드 에비던스(Real World Evidence·RWE) 등 제출자료 요건 범위를 확대하고, 최초 개발자에게 지원을 보상하는 제도시행을 건의했다.
관련해 식약처 담당자는 “6월까지 업계의 다양한 의견 수렴을 통해 대안을 마련하겠다”고 입장을 밝힌 것으로 전해졌다.
이밖에 인공지능(AI)·빅데이터 등 융·복합 혁신(첨단)의료기기의 허가심사·사후관리를 담당하고 시장진입을 지원하는 전담조직 신설을 위한 TF 구축이 건의사항으로 전달됐다.
앞서 업계는 혁신의료기기 허가·심사 가이드라인 등 규제기준과 방향을 발 빠르게 수립해 업체들의 제품 개발 불확실성을 해소하고 신속한 시장진입을 지원하는 ‘디지털 헬스케어 의료기기 TF’와 같은 식약처 내 전담조직 신설 필요성을 꾸준히 제기해왔다.
한편, 김연명 청와대 사회수석은 업계가 제시한 건의안을 적극 검토하겠다는 입장을 밝힌 것으로 전해졌다.
간담회에 참석한 예정훈 의료기기규제연구회 위원에 따르면, 김 사회수석은 “국민 안전을 저해하지 않는 선에서 의료기기 규제를 완화하겠다는 것이 현 정부의 정책 방향”이라고 강조하며 “오늘 간담회에 사회수석실 행정관들도 함께 왔기 때문에 업계 건의안을 꼼꼼히 검토해 반드시 답을 주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황선빈 위원 역시 김 사회수석이 국민 안전을 저해하지 않는 규제 샌드박스 범위 내에서 의료기기 규제 완화 입장을 표명했다고 전했다.
황 위원에 따르면, 김연명 사회수석은 “정부가 혁신의료기기·신약 인허가부터 급여까지 전체 프로세스를 살펴보고자 한다”고 말했다.
특히 “의료기기의 경우 기술 개발 속도는 빠른데 규제는 예전 그대로다. 혁신의료기기는 기존 규제 틀로는 안 되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검토하겠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