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이다. 알람이 울린다. 눈을 뜨기가 싫다. 하지만 떠야 한다. 내가 지각하면 함께 혼날 실습 조 동기들의 얼굴이 눈 앞에 선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여전히 차가운 아침 공기는 쉽사리 익숙해지지 않는다. 가능한한 마지막 일 분까지 이불 속에서 뒤척이다가 얼른 이불을 떨치고 일어나서 바쁘게 준비를 한다. 후다닥 아침도 먹고 커피도 끓여서 한 잔 마시고 실습 복장을 갖춘다. 오늘 외래가 있었나? 가방에 청진기를 챙긴다. 마지막으로 옷걸이에 걸어둔 실습 가운을 챙기고 한 번 집을 휘둘러본 다음 얼른 구두를 신고 집을 나선다.
오늘 첫 일정은 외래 참관이다. 대기하는 환자들로 와글와글한 병원 대기실을 지나 교수님 진료실 앞에 가 선다. 함께 실습을 도는 동기가 보인다. 교수님 외래 환자 확인했어? 어제 미리 EMR을 체크해서 적어뒀던 환자 목록을 본다. 그런데 웬걸 교수님 대기 환자에 떠 있는 이름은 완전히 새로운 이름이다. 이게 뭐지? 그 사이에 신환이 들어왔나? 혼란스럽지만 일단 자세를 갖추고 앞에 외래 참관을 하던 동기들을 기다린다.
어느 순간 진료실 문이 달칵 하고 열린다. 앞 타임 외래를 참관한 동기들의 얼굴이 보인다. 잠시 인사를 주고받고 진료실 문고리를 붙잡고 허리를 숙인다. "안녕하십니까 교수님!" 나보다 아마도 더 이른 시간에 훨씬 바쁘게 움직이셨을 교수님의 얼굴이 보인다. 바쁘다. 표정에서는 피곤함이 읽히지 않지만 아마 교수님께서도 피곤한 아침을 보내셨을 거다. 반갑게 우리를 맞아주시면서도 손과 눈은 EMR을 떠나시지 못한다. "어제는 뭐 했어? 그거 관련해서 질문은 없니?" 질문을 받아주시려고 하다가도 다음 환자가 들어온다.
이번 과는 소아과라 환자들이 어리다. 교수님께서는 다정하게 이름을 부르시며 환자를 맞으신다. 2달만에 보네요~ 심전도 힘들진 않았어요? 교수님께서 청진기를 소독하고 환자 심음을 청진하는 것을 어깨너머로 바라본다. 저기, 저기, 저기, 저기 저 순서였지. 저기서는 무슨 심음이 들리더라. 손에 들고 있는 클립보드에다가 환자 병명과 증상을 적어내려간다.
다리가 아프다. 시계를 흘끔 본다. 외래 참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사람들로 가득한 대기실을 가로질러 심초음파실로 갈 준비를 한다. EMR에 오더를 넣으시던 교수님이 어느 순간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서 진료실을 나가신다. 얼른 그 뒤를 바짝 붙어 따른다. 대기실에 사람이 너무 많아서 자칫하면 교수님을 놓칠 수도 있다. 가면서 다른 동기들에게 연락을 넣는다. 지금 내려가니까 심초음파실 앞에서 만나자. 레지던트 선생님과 교수님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하며 동선에 방해가 되지 않게 조심스럽게 자리 선정을 하여 선다.
초음파를 찍어야 하는데 어린 아기 환자가 병원이 떠나가라 빽빽 운다. 교수님은 익숙하다는 듯이 초음파실 컴퓨터로 뽀로로를 틀어주신다. 어느새 환자 입에는 츄파춥스가 물려 있다. 초음파 화면으로 심장을 왔다갔다하는 혈류를 열심히 바라본다. 초음파실은 어둡다. 하지만 졸리진 않는다. 계속 서있어야 해서 다리가 아프기 때문이다.
이런 일상이 매일 조금씩 다른 순서로, 달마다 다른 과로 결만 달리하며 반복된다. 그러나 스쳐지나가는 환자들은 너무나 다르다. EMR을 켜서 의무 기록을 읽다보면 이런 생각이 든다. 당신은 어떤 삶을 살아오셨길래 이 병으로 우리 병원에 오시게 되셨나요? 특히 나이가 많은 환자일 수록, 과거력란에 적혀 있는 병명이 많을 수록, 의무기록에 적혀 있는 내용이 자세할 수록 그런 생각은 더 자주 든다.
매일 소주 2병을 마셔서 당뇨병과 고혈압, 간염을 기저질환으로 달고 온 환자를 보면서는 이 사람은 어떤 인생을 살았기에 매일 소주 2병을 마시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론 공부를 하다가 넘어와, 아직 실습 가운이 더러워지지도 않은 채인 새파랗게 어린 초짜 학생 의사의 눈에 모든 것은 생경하게 다가온다. 본과 공부 2년, 인간 대 활자의 싸움을 마친 실습생에게 이제는 그 활자들이 담고 있던 내용이 사람으로 다가온다. 그러면서 실습생은 조금씩 깨닫는다. 내가 그동안 알고 있던 지식 너머에는 수천년간 쌓아온 무한한 데이터가 있음을 머리가 아니라 피부로 깨닫기 시작한다. 그리고 겸허해진다.
실습은, 나의 지식을 측량하는 과정이 아니라, 나의 무식을 인지하고 조금씩이나마 그것을 고쳐나갈 수 있는 기회임을, 비로소 느끼기 시작한다. 이 기회의 소중함을 깨닫고 노력한다면 2년 뒤 나의 과거를 돌이켜 보았을 때 후회하지 않을만한 시간이 되지 않을까. 하고, 실습생은 다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