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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상백 교수의 의학과 미술]

안티고네와 의정갈등

메디칼타임즈=고상백 교수 그리스 화가 리트라스(Lytras)의 그림에는 두 인물이 등장한다. 제목으로 볼 때 앞에 누워있는 남자는 장례를 치르지 못한 폴리네이케스, 뒤에 서 있는 여자는 그를 애도하는 안티고네로 추정된다. 폴리네이케스에게 밝은 명암을 사용한 것은 사건의 시작을 알리는 동시에, 그의 죽음이 논란의 중심에 있다는 것을 알리려는 의도로 보인다. 반면, 안티고네가 어둠 속에 배치된 것은 단순한 미술적 표현을 넘어, 그녀의 내면과 처한 상황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중요한 요소다. 고대 그리스 비극에서 어둠은 죽음, 비극적 운명, 그리고 사회적 고립을 상징하는데, 이 그림에서도 이러한 의미를 시각화하고 있다. 니키포로스 리트라스 작 <폴리네이케스 앞에 선 안티고네>(1865)Nikiforos Lytras. Antigone in front of the dead Polynices (1865). 만약 안티고네에게 약간의 빛이 비춘다면, 이는 그녀의 도덕적 의지와 순수성, 혹은 그녀가 추구하는 정의를 수용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 안티고네를 어둠 속에 배치함으로써 그녀의 죽음을 예고하며, 이 상황에서 벗어나기 어렵다는 점을 시사하고 있다.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는 그리스 비극 중 최고의 작품이다. 안티고네는 오이디푸스의 딸이다. 두 오빠 에테오클레스와 폴리네이케스는 아버지의 자리를 두고 서로 싸우다 전쟁에서 모두 전사한다. 새로운 테베의 왕인 크레온은 에테오클레스에게는 명예로운 장례를 치르게 한다. 그러나 이웃나라의 힘을 빌려 권력을 얻으려 했던 폴리네이케스를 반역자로 간주해 그의 장례를 금지하고, 시신을 들판에 방치하라고 명령한다. 이를 어기면 사형에 처하겠다고 경고하며, 이 명령은 곧 국법이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안티고네는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왕의 명령인 국법을 따를 것인지, 아니면 가족의 의무를 다해 오빠 폴리네이케스의 장례를 치를 것인지 고민하게 된다. 안티고네는 자신의 몰락을 예감하면서도 크레온의 명령에 반대해 신의 법과 가족의 의무를 따라 오빠의 장례를 치르기로 결심한다. 현실적이고 타협적인 동생 이스메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안티고네는 혼자서 오빠의 시신에 흙을 뿌리며 장례 의식을 감행한다.크레온과 안티고네의 대립은 점점 격화되지만, 두 사람 모두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는다. 파국이 예상되는 상황에서도 크레온의 아들이자 안티고네의 약혼자인 하이몬의 중재는 크레온에게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 크레온은 반역자인 안티고네를 처벌하기 위해 언로를 차단하고, 자신의 명령에만 집중한다. 그는 국가를 위한 자신의 결정을 옳다고 확신하며, 그의 강박은 절정에 이른다. 안티고네는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고도, 죽음으로 향하는 충동에 이끌려 그 길을 선택한다. 안티고네가 살아 있지만 무덤에 갇히면서 상황은 모순과 역설을 드러낸다. 크레온의 국법은 옳지만, 동시에 옳지 않다. 안티고네가 따르는 신의 법이 가족에 대한 의무가 틀리지 않기 때문이다. 하이몬은 아버지 크레온을 사랑하지만, 동시에 사랑하지 않는다. 크레온의 아내 에우뤼디케는 남편을 사랑하지만, 그 사랑은 무너져간다. 크레온은 뜻을 관철했지만, 가족과 모든 것을 잃게 된다.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라틴아메리카를 대표하는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라는 작품을 오마쥬한 '썩은 잎(La Hojarasca)'이라는 작품을 썼다. 마르케스의 대표작인 '백년의 고독'은 '썩은 잎'이라는 초기 작품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이 '썩은 잎'이라는 작품에는 마콘도라는 마을, 대령, 그리고 바나나 농장이 주요 배경으로 등장한다. 이야기는 의사의 시체를 두고 대령과 마을 사람들이 갈등하는 장면을 묘사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이 점에서 '안티고네'와 유사한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상황과 접근 방식에서 차이를 보인다. 그렇다면 왜 의사는 마을 사람들로부터 장례를 거부당할 정도로 인심을 잃었을까? 발단은 바나나 회사의 도착에 있다. 회오리바람처럼 갑작스럽게 마을에 나타난 바나나 회사는, 그 뒤에 썩은 잎들이 따라오면서 마콘도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마콘도는 본래 약속의 땅이자 평화의 상징이었으나, 바나나 회사의 도착 이후 몇 년간 머물면서 마을에 번영을 가져오기도 했지만, 동시에 마을의 미래를 앗아가는 주체가 되었다. 아라미스 구티에레스. 백년의 고독 이후 (2007)Aramis Gutierrez, After One Hundred Years of Solitude (2007)흥미롭게도, 이 작품의 제목은 처음에 '집'이었다. 그러나 클레멘테 마누엘 사발라가 쓴 기사에 영감을 받아 제목이 '썩은 잎'으로 변경된 것으로 보인다. 사발라는 '썩은 잎'을 '원래의 것에 상처를 입히고 궁지에 몰아넣는 이상한 것'이라고 설명하며, 이 표현은 작품의 주제를 더욱 깊이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썩은 잎'은 마콘도의 변화와 그로 인해 발생한 갈등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제목이라 할 수 있다.회오리 바람이 마을 한가운데 뿌리를 박은 듯 소용돌이 치는 속에서 한 남성이 마을 위로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마콘도에 등장한 비극적인 역사와 혼란을 상징하고 있다. 구티에레스는 여기에 몽환적이고 초현실주의적인 기법을 적용하여, 현실과 환상이 혼합된 마법적 사실주의를 회화적으로 표현했다. 부드러운 색조와 함께 그림에 흐르는 고요함은 폭풍 속의 혼돈과 대비되며, 마콘도에서 사는 인물들이 겪는 내적 고독과 외부의 갈등을 시각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바람에 휩쓸리는 인물은 소설 속 마콘도의 주민들이 겪는 불가피한 변화와 파멸을 상징하는 동시에, 인간 존재의 고독과 역사의 반복성을 드러내고 있다. 두 작품에서 드러난 갈등에 얽힌 이야기는 우리사회가 겪고 있는 의정갈등에서도 재현되고 있다. 갈등이 심화될 경우 의료 서비스의 질 저하와 국민 건강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 안티고네와 크레온의 비극적 결말이나 마콘도의 쇠락처럼, 현재 진행 중인 의정 갈등도 결국은 양측 모두에게 비참한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이 갈등은 단순한 선과 악의 대립이 아니라, 상호 배제적인 두 주장의 충돌이다.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두 가지 정당성이 충돌하는 상황을 어떻게 이해하느냐가 핵심이다. 크레온은 자신의 명령을 고수하여 뜻을 이루었지만 모든 것을 잃었고, 안티고네는 자신의 목숨을 버리면서 가장 중요한 가치를 지켰다. '안티고네'의 역설을 우리는 반복하지 말아야 한다. 정부는 진심으로 사과하고, 의료계의 전문성을 인정하며 진정한 대화에 나서야 할 시점이다. 눈먼 예언자 테이레시아스는 크레온의 결정을 신에 대한 도전인 '휴브리스(hubris)'로 해석하며, 크레온 가문에 불행을 불러올 것이라 예언했다. 휴브리스는 지나친 자만이나 오만으로 신이나 자연의 질서를 무시하는 태도를 의미한다. 크레온은 자신의 명령을 철회하지만, 이미 너무 늦어 비극적인 결말을 피하지 못한다. 이러한 비극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의료계에 덥친 회오리 바람을 잠재우기 위해 정부는 문제 해결을 위한 조속한 접근이 필요하다. 이는 정책적 실패가 아니라 의정 갈등 해소와 국민 건강 보호의 초석이 될 것이다.
2024-10-30 05:30:00의료기기·AI

동·서양을 연결하는 터키로…파묵칼레냐, 히에라폴리스냐?

메디칼타임즈=양기화파묵칼레냐, 히에라폴리스냐? 우리 일행이 파묵칼레(Pamukkale)에 도착한 것은 2시를 조금 넘긴 시간이었다. 이곳에서 우리는 파묵칼레라는 지명이 유래한 석회봉과 히에라폴리스(Hierapolis) 유적을 구경하게 된다. 파묵칼레는 우리말로 '목화(木花)의 성'이다. 아주 오래전에 석회암으로 된 산의 위쪽에서 온천이 분출해서 온천수가 오랜 세월에 걸쳐 석회암 위를 흘러내렸다. 그 온천수 녹여낸 하얀 침전물이 쌓여 만들어낸 장관이 마치 하얀 성벽을 이룬 것이다. 우리네 같으면 '눈의 성'이라고 했을 법하다. 그런데 평생 눈을 구경해본 적이 없다는 이 지방 사람들은 주변에 흔히 보는 하얀 목화밭과 닮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히에라폴리스는 페르가몬왕조(기원전 282-기원전 133)로부터 로마제국으로 이어지는 유적이다. 파묵칼레 석회봉의 장관 우리 가이드는 히에라폴리스와 파묵칼레에 대하여 간략하게 설명을 해주고는 1시간 반 정도의 자유시간을 주었다. 우리는 목화의 성 맨 위에 섰다. 눈앞으로는 목화의 성이 펼쳐지고 뒤로는 히에라폴리스의 유역이 흩어져 있다. 목화의 성 위에 서는 순간 널따랗게 펼쳐지는 순백의 향연에 그저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다. "신이시여, 진정 당신이 이것을 만드셨습니까"하는 질문이 마음속에 떠오른다. 하늘 가까이 두둥실 떠오른 행글라이더가 눈길을 끈다. 부럽다. 석회봉의 진정한 장관을 보려면 가장 멀리 있는 세 번째 욕조까지 내려가야 할 것 같다. 그런데 거기까지 다녀오려면 적어도 40분은 걸릴 것 같다. 결국 히에라폴리스를 모두 돌아보기를 원하는 아내의 말대로 파묵칼레의 맨 위쪽에 있는 욕조에 발을 담가보는 정도로 아쉬움을 달래기로 했다. 신발을 벗어 비닐봉지에 담고 맨발로 조금은 미끄러운 돌 위를 걸어 욕조에 들어섰다. 맨 위의 욕조는 이미 순백을 잃고 있었다.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발길에 묻어온 돌가루 때문에 오염된 탓일게다. 아내와 나는 이내 히에라폴리스 쪽으로 발길을 옮겼지만 그곳에서는 사람들을 별로 만나볼 수 없었다. 우리 일행들도 대부분 파묵칼레 욕조의 온천수에서 쉽게 발을 뺄 수 없었던 모양이다. 참고로 이종헌 기자는 '이곳의 진수는 파묵칼레가 아니다. 바로 그 뒤에 있는 성스러운 도시 히에라폴리스다.(1)'라고 적었다. 히에라폴리스는 기원전 190년 무렵 페르가몬왕국의 에우메네스2세(Eumenes II)가 세웠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최근에 발굴된 비문은 그보다 오래된 기원전 2~3세기 셀레우코스왕조 무렵에 이미 도시가 있었다고 전하고 있다. 서기 6세기 무렵 비잔틴의 스테파노스가 편찬한 지리학 사전에는 이곳에 신전이 많았기 때문에 '성스러운 도시'라는 의미의 히에라폴리스라고 불렀다고 적었지만, 일반적으로는 페르가몬왕국의 시조인 텔레포스(Telephos)의 부인 히에로(Hiero) 혹은 히에라(Hiera)에서 따온 것이라고 알고 있다. 이 곳에는 아폴론, 하데스, 키벨레와 포세이돈 그리고 아폴론의 어머니 레토와 같은 소아시아 태생의 신들을 모시는 신전이 많았는데, 아마도 온천과 함께 지하로부터 올라오는 유독가스로 피해를 입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페르가몬왕조가 로마의 속주로 편입된 이후, 기원전 17년과 기원후 60년에 큰 지진으로 파괴되었는데 네로황제의 지원으로 복구하였다. 비잔틴제국 시절까지 번영을 누려오던 이곳은 아랍과 투르크의 공격을 받으면서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12세기 무렵 이곳을 점령한 셀주크 투르크는 이곳에 사는 사람들을 이웃에 있는 데니즐리로 강제이주시켰고, 1334년 강력한 지진이 발생하여 도시가 완전히 무너지면서 도시는 폐허가 되고 말았다. 석관들이 흩어져 있는 네크로폴리스의 정경(위), 프론티누스문(왼쪽 아래), 아고라(오른쪽 아래) 히에라폴리스는 생각보다 넓게 흩어져 있었다. 가장 깊은 곳에 있는 네크로폴리스[사자(死者)의 도시]까지 정신없이 걸어가는데도 거의 10분 이상 걸렸던 것 같다. 1,200여기의 석관이 흩어져 있다는 사자의 도시 입구에서 발길을 돌렸다. 웬지 유령들이 어슬렁거릴 것처럼 황량함에 질렸기 때문이다. 흩어져있는 히에라폴리스의 유적을 돌아보기 위하여 숨이 턱에 차게 돌았다. 북쪽 끝 사자의 도시 입구에서 길을 되집어 목욕탕, 도미티아누스황제가 세워다는 프론티누스 문을 지나 아고라를 가로 지른 다음에 대극장으로 이어지는 오솔길로 들어섰다. 히에라폴리스의 옛 건물들은 모두 무너져 내렸지만, 그래도 말짱하게 남아 있는 원형극장이나 기둥들을 보면 그때의 대단했을 풍경들이 그려지는 것 같다. 엉뚱한 길은 아닐까 하는 걱정 속에 대극장으로 방향을 잡았다. 동쪽으로 빌립보 순교지가 손에 잡힐 듯 한데 시간에 쫓겨 엄두도 내지 못하고 대극장 방향을 고수했다. 멀리서 본 대극장(상), 대극장 내부(하) 대극장에 들어서는 순간 '아!' 하는 탄성이 절로 나온다. 엄청난 지진에도 살아남았다는 대극장은 너무 멋있었다. 크레옹왕과 안티고네가 무대 위에 등장해서 치열한 대결을 펼칠 듯하다. 아니 내가 바로 저 무대에 올라 연기를 펼치는 환상에 젖는다. 대극장은 셉티무스 세베루스 황제 때 세운 것으로 로마시대의 원형극장들 가운데 아펜도스에 있는 것 다음으로 보존상태가 양호하여 지금도 연극공연이나 음악회가 열린다고 한다. 여덟 개의 계단으로 50줄의 객석이 나뉘어져 있어 모두 12,000명이 동시에 입장할 수 있다. 객석이 널따랗게 펼쳐져 있지만, 마이크도 스피커도 없던 그 옛날처럼 지금도 무대에서 배우들이 주고받는 대사가 객석 맨 끝까지 똑똑하게 들린다고 한다. 옛날에 이곳을 다녀온 사람들이 찍은 사진과 다소 차이가 있어 보였는데 보수작업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한낮의 뜨거운 햇볕에 쫓겨 파묵칼레를 물러나면서 장은정씨가 적은 이곳의 황혼을 부러워한다. "한낮의 뜨거운 태양이 물러나고 작은 시골 마을에 붉은 빛 노을이 내려앉을 무렵, 눈부시게 하얗던 석회붕이 붉은 노을빛을 그래도 받아들여, 때로는 오렌지빛이었다가 잠시 보랏빛이 되었다가 다시 붉은빛으로 물드는 모습은 그 어떤 단어로도 설명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2)" 그놈의 양고기 때문에 이토록 아름다운 파묵칼레의 석양을 볼 수 없었던 것이 못내 아쉽다. 베드로가 하루 세 번 예수를 부정했다던가? 오전에 안탈리아에처럼 아내 말을 듣지 않아 후회하는 일이 또 생겼다. 버스에서 내리기 전에 아내는 햇볕이 뜨거우니 팔토시를 하라는 말을 듣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버스에서 내려 불과 20미터를 걷고서 바로 후회했다. 쏟아지는 햇볕에 팔뚝이 따갑다 못해 아프기까지 했던 것이다. 아쉬운 대로 선크림으로 응급처지를 했다. 하지만 파묵칼레의 너무 화창한 날씨 덕분에 버스로 돌아왔을 때는 마치 술이라도 마신 듯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저녁을 먹은 아내가 얼굴팩을 해주겠다는 특별한 부탁을 했을 때는 거절할 핑계가 없었다. 용모가꾸기에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는 편이지만, 이날은 아내의 특별한 부탁에다 유난히 뜨거웠던 햇볕에 시달렸던 것을 생각해서 팩을 해보게 되었다. 팩이 끝나고 나서는 얼굴이 화끈거리는 느낌이 없어져 잘했다는 생각을 한다. 이날 나는 베드로와는 달리 적어도 한번은 아내의 말을 들었다는 거다. 석회봉에서 15분쯤 버스로 이동하여 꼴로쎄(Colosae)호텔에 짐을 풀었다. 방에서 간단하게 샤워를 하고는 온천욕을 즐겼다. 우리나라와는 달리 온천물은 36°C 수준이었다. 깔끔한 욕탕에서 50여분 동안 느긋하게 피로를 풀 수 있었다. 아쉬운 점은 염소냄새가 나는 것 같아 온천욕이 끝난 다음에 방으로 돌아와 샤워를 다시 했다. 참고자료 (1) 이종헌 지음. 우리가 미처 몰랐던 터키 역사기행 262쪽, 소울메이트, 2013년 (2) 장은정. 언젠가는 터키 158쪽, 리스컴, 2013년
2015-11-16 05:10:32오피니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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