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디칼타임즈>는 의료계의 과거의 다양한 모습을 짚어보고 이를 통해 현재와 미래를 바라보기 위해 'Back to the 의료계'를 연재합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편집자 주>
"담쟁이 넝쿨과 빨간 벽돌집, 스칸디나비안 클럽…"
국립의료원(현 국립중앙의료원)의 반세기 역사를 대표하는 상징물이다.
올해 개원 54주년을 맞은 의료원은 한국 의료계가 성장하고, 아파한 굴곡의 역사 중심에서 함께 호흡했다.
정부는 1950년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된 의료시설을 복구하기 위해 스칸디나비아 3개국(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에 진료교섭을 요청해, 서울에 종합병원을 설립하기로 합의했다.
이렇게 탄생한 의료기관이 국립의료원(National Medical Center)이다.
국립의료원은 스칸디나비아 3개국의 원조를 받아 1958년 이승만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320병상 종합병원으로서의 개원식을 가졌다.
당시 스칸디나비아인 의료진은 의사 24명, 간호사 및 기사 46명, 행정직 19명 등 총 89명이 근무했다.
개원하자마자 의료원에는 많은 환자들이 밀려왔다.
새벽부터 의료원 앞에 줄지어 기다리는 극빈자로 25% 자비 부담 환자 수진비율은 지켜지지 않아 병원 수입은 감소했으며, 이에 따른 부족액은 스칸디나비아 측에서 감당했다.
특이한 사항은 25% 자비 부담 환자도 하루 1100원(당시 진료비)으로 입원료와 약제, 처치 수술료를 포함한 포괄수가제 방식을 채택했다.
의료원은 1960년 25명의 첫 인턴 모집을 시작으로 서울대병원과 의료진 교류를 갖는 등 명실공이 국내 최고 수련병원의 위상을 공고히 했다.
외국 의사들이 주도한 초창기인 1962년 수련위원회를 설립해 인턴과 레지던트 교육계획 작성과 수련의사 선발 규정 등을 정하는 등 현행 수련제도의 기초가 됐다.
국립의료원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간호대학이다.
의료원 개원 이듬해인 1959년 개교한 간호대학(당시 간호학교)은 학비와 숙소 모두 무료로 제공돼 당시 국내 48개 간호학교 중 최고의 인기를 구사했다.
2008년 간호대학이 폐지되고 2008년 마지막 졸업식까지 50년간 1989명의 간호사를 배출하며 미국과 캐나다 등 선진국과 국내 주요 대학병원, 심사평가원 등 현재까지 국내외 의료계에서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과거 최고의 명성을 구사한 의료원도 현재와 같이 수입 감소에 따른 경영 문제를 고민했다.
저렴한 진료비와 의료수가 기준책정 시범병원 그리고 입원환자의 20% 이상이 의료보호 환자와 국비 환자로 채워지면서 경영적 어려움을 겪었다.
행정직의 잦은 전출과 전입 그리고 의과대학이 없어 의료원에서 근무하는 많은 의사들이 타 대학에서 학위과정을 이수한 부분도 의료원 발전에 저해요인으로 작용했다.
이러한 환경은 1970년대 의대 신설 열풍으로 의료원 의사 스카우트 열기로 이어져 대학병원 원장과 주임교수로 성장해 왕성한 활동을 벌인 반면, 원내 의료진이 위축되는 현상을 보였다.
하지만 의료원은 70년대 후반 국가중앙병원으로서 자궁경부암 등 암 등록사업(2000년 국립암센터로 이전)을 첫 실시해 보건복지부의 암 정복 10년 계획의 견인차 역할을 담당했다.
과거 유명 정치인들의 모임장소로 알려진 스칸디나비안 클럽(당시 외국의료진 구내식당)은 국내 최초 뷔페식당으로 회원제 운영에서 1980년 들어 일반인에게 개방돼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다.
90년 후반 국립의료원에 최대 위기가 닥쳤다.
1997년 복지부는 재정경제원(현 기획재정부)과 예산편성 협의 과정에서 국립의료원 폐원을 합의했다.
부지도 민간 매각 방침을 확정했다.
당시 주요 신문들은 '국립의료원 민간에 매각' '국립의료원 문 닫기로' 등 국립의료원 위기 소식을 연일 보도했다.
의료원 모든 의료진과 간호대학 동문회는 '국민들께 드리는 호소문'을 일간지에 광고하며 폐원 저지운동을 전개했다.
스칸디나비아 3개국도 의료원 폐원에 반대 입장을 표명하는 등 국제적 문제로 비화되는 양상을 보였다.
결국, 같은 해 10월 국회 보건복지위원회는 국립의료원 매각 반대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채택하며 결국 정부도 재검토로 입장을 바꿨다.
국립의료원은 2000년 들어 새로운 변화를 맞이했다.
당시 책임운영기관으로 지정되면서 장기이식관리센터(KONOS) 및 중앙응급의료센터 개소 그리고 2003년 국가중앙의료원 설립추진단 구성으로 현재까지 진행 중인 원지동 이전 문제가 본격화됐다.
의료원의 역할을 각인 시킨 사건은 2000년 의약분업이다.
그해 6월 서울대병원 등 대형병원을 포함한 의료계 전체가 의약분업에 반대해 집단폐업에 들어간 의료대란이 벌어졌다.
국립의료원도 예외는 아니었다.
전공의 150명이 폐업에 동참해 응급실과 진료 기능이 사실상 마비 상태였다.
하지만, 전문의 71명은 동료 의사들의 집단행동에 동의하면서도 국가병원 역할을 위해 외래와 응급실, 중환자실, 수술실 등에 24시간 상주하며 6일간 지속된 의료대란으로 밀려드는 환자 치료에 혼신을 다했다.
많은 국민들은 의료원 의료진에게 감사의 뜻을 담은 꽃다발을 전달해 당시 의료원 로비에는 꽃 향기가 가득한 이색적인 풍경을 연출했다.
성형외과 박철규 전문의(서울의대 명예교수)는 "80년대까지 국립의료원은 서울대병원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최고의 수련병원이었다"면서 "의료원 스탭으로 간 것은 교수들 사이에서도 자랑이며 자부심이었다"고 회상했다.
홍인표 부원장은 "의료원은 학맥과 인맥을 떠나 실력 있는 의사를 공정하게 선발하는 기회와 꿈의 병원이었다"면서 "여러 대학 출신이 한데 모여 최고의 술기를 위해 배려하고, 노력하는 정신은 지금도 지속되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