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7월 포괄수가제(DRG)의 종합병원급 이상 확대 적용을 두고 다시 한번 DRG의 의료 질 저하 논란이 불붙고 있다.
의료계는 포괄수가제가 고위험군 환자의 진료 기피와 획일화된 진료로 의료 질 저하가 필연적이라는데 반해 정부는 DRG가 과잉진료를 줄이는 순기능의 역할이 크다고 맞서고 있다.
2012년부터 DRG를 시행하고 있는 병의원에서 나타난 변화 양상을 중심으로 포괄수가제의 문제점들을 짚어봤다.
<상> 병의원 DRG 시행 1년 "얻은 것보다 잃은 게 많다" <하> DRG 시행 앞둔 종합병원 벌써부터 걱정
# 복강경을 이용한 자궁근종 수술을 고수해왔던 A대학병원 김모 교수(산부인과)는 최근 로봇수술을 배우기 시작했다. 7월부터 DRG가 시행되고 복강경 수술을 유지하기 어려워지면 아직 비급여 항목인 로봇수술이 대안이 되지 않을까 싶어서다.
# B대학병원 박모 교수(이비인후과)는 당장 7월부터 코 비염을 수술할 때 코블레이터라는 고주파장비를 계속 사용해야하나 고민이다. 환자 통증도 적고 회복도 빠르지만 1회 30만원에 달하는 치료재료를 DRG 수가체계에선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7월 1일 포괄수가제 확대 시행을 앞두고 대학병원 의료진들이 우려를 쏟아내고 있다. 당장 병원 수익이 감소하는 것과 무관하지만, "환자 진료 선택권을 침해하는 좌절감을 안겨주는 제도"라고 입을 모으고 있다.
"최선의 진료가 아니라, 최소 진료하라고?"
대학병원 의료진들이 지적하는 문제는 좋은 장비로 충분히 치료할 수 있는 환자도 제도의 틀에 막혀서 최소 진료를 하게 된다는 점이다.
당장 산부인과 교수들은 고가의 치료재료 사용이 어려워질 것으로 전망했다.
K대학병원 교수는 "산부인과 개원가에서 유착방지제가 사라지고 있는 현상은 대학병원에서도 이어질 수 밖에 없다"면서 "지금까지 환자의 부담으로 가능했지만 정해진 수가보다 비싼 고가의 치료재료를 어떻게 쓸 수 있겠는가. 환자가 요구해도 해줄 수 없는 상황이 될 것"이라고 토로했다.
실제로 지난해부터 DRG 시행에 들어간 H이비인후과 전문병원은 코블레이터를 이용한 수술을 중단했다.
해당 병원장은 "좋은 의료장비라는 사실을 잘 알지만 현실적으로 사용할 수 없다. 한건당 수십만원씩 손해를 보면서 수술을 할 순 없지 않겠느냐"고 전했다.
A대학병원 이비인후과 교수는 "결국 정부가 원하는 것은 최선의 진료가 아니다. 최소의 진료만 하라는 얘기 아니냐"면서 "이제 남은 것은 의학발전의 퇴보 뿐"이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또 다른 이비인후과 교수는 현재 환자의 편의를 고려해 동시에 실시해왔던 수술이 앞으로는 사라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가령, 편도수술을 하면서 중이염 수술을 함께 진행한다던지 편도수술을 하면서 비중격성형술을 동시에 실시하는 사례가 줄어들 것이라는 얘기다.
이는 산부인과도 마찬가지다.
한 산부인과 교수는 "지금까지는 자궁근종 수술을 할 때 기형종 수술이나 자궁내막증 수술을 동시에 실시해 환자의 부담을 덜어줬지만 DRG 시행 5년후에는 분위기가 달라질 수 있다"고 했다.
그는 "아직은 의사 양심상 동시에 수술하지만 시간이 흘러 의사들이 DRG수가체계에 적응하다보면 수가에 해당하는 수술만 실시하는 방법으로 건수를 늘려갈 것"이라고 내다봤다.
"수익감소 예상되는 병원들 편법 어쩌려고"
한편에선 DRG 시행으로 신의료기술이 위축되면 편법이 나올 것이라는 우려도 높다.
A대학병원 산부인과 교수의 주장이 대표적인 사례다.
그는 "의학기술을 퇴보시켜서 절개수술로 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로봇수술을 선택할 것"이라면서 "몇년 후 로봇수술 비용까지 낮아지면 로봇수술이 복강경 수술을 대체할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했다.
그는 "복강경 수술은 어떤 장비를 쓰느냐에 따라 가격차이가 크기 때문에 수술을 하다보면 비용이 DRG수가를 벗어날 수 밖에 없다"면서 "차라리 로봇으로 마음 편하게 수술하고 싶다"고 털어놨다.
또 다른 문제는 충분히 치료할 수 있는 환자도 리스크를 최소화하기 위해 편법으로 진료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S대학병원 산과 교수는 "복강경 수술을 하다가 정 안되면 자궁적출술을 했지만, 이제 결과적으로 실시한 의료행위에 대해서만 수가를 인정해준다면 얘기가 달라질 것"이라면서 "의사는 최선의 진료를 할 권리를 환자는 최선의 진료를 받을 권리를 박탈당하게 된다"고 우려했다.
산부인과학회 신정호 사무총장은 "대형병원으로 중증도 높은 환자의 쏠림현상이 심각해지면 대형병원도 감당하기 어려워질 것"이라면서 "환자 한두명 정도는 손해를 감수하고 수술을 하지만 중증도 높은 환자가 몰리면 언젠가는 문제가 곪아 터질 것"이라고 환기시켰다.
"신의료기술 퇴보…미래가 없다"
또한 정부의 의료산업화 정책을 비웃는 교수들도 많다.
의료산업을 육성하겠다면서 신의료기술 등 새로운 의료장비를 사용할 수 없는 여건을 만드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지적이다.
실제로 산부인과에서 사용하는 복강경 장비만 해도 1년이 멀다하고 새로운 치료재료와 장비가 출시된다.
각 대학병원은 경쟁적으로 이를 도입해 의료의 질을 높여왔지만 DRG가 시행된 이후에도 계속될 지는 의문이다.
E대학병원 교수는 "DRG 시행 이후 대학병원들이 고가의 의료장비 구매를 꺼리게 되면 자연스럽게 시장은 침체될 것"이라면서 "이것이 의료를 산업화 한다던 정부의 정책이냐"고 반문했다.
좌절감에 빠진 의사들…앞으로가 더 걱정"
상당수 교수들은 진짜 문제는 5년 혹은 10년 이후에 드러날 것이라고 보고 있다.
일단 당분간은 대학병원 의료진도 기존 진료패턴을 유지하겠지만, 시간이 흘러 DRG제도를 다른 질병군까지 확대하고 수가가 제자리걸음을 한다면 최악의 의료시스템이 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S대학병원 외과 교수는 "가령 정부가 DRG 시행에 따라 120% 수가를 인상해준다고 해도 매년 재평가를 통해 수가를 재조정할텐데 악순환을 초래할 것"이라고 했다.
병원은 정해진 수가에서 더 많은 수익을 남기기 위해 저가의 치료재료를 사용할 것이고, 정부는 재평가를 통해 병원들이 수익이 남을 정도로 수가가 높게 책정돼 있다며 낮추려 들다보면 의료가 망가질 것이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K대학병원 외과 교수는 "정부는 그동안 의사의 희생에 의해 보험체계를 유지하고 있다고 말하면서 또 다시 건보재정 적자를 줄이기 위해 병원의 숨통을 막고 있다"면서 "보험재정 책임을 의사에게 떠 넘기는 것은 참기 힘들다"고 꼬집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