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불황과 보장성 강화정책으로 대학병원들이 한도 끝까지 허리띠를 졸라매면서 교수들이 진료에만 내몰리는 부작용이 나타나고 있다.
이로 인해 대학병원 본연의 기능인 교육과 수련은 물론, 연구기능이 사실상 붕괴되고 있어 의학의 근간이 흔들리고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비상경영체제의 그늘…인센티브 없애고 할당제 도입
A대병원 교수들은 오전 7시 30분이 되면 스트레스가 밀려온다. 교수별 진료 실적과 수익금액이 원내 인트라넷을 통해 공개되기 때문이다.
이 병원이 이러한 시스템을 도입한 것은 두 달전. 전국의 대학병원들이 비상경영체제를 선언한 시점부터다.
사실 두 달전만해도 이 병원은 선택진료비 일부를 포함해 진료 실적에 따라 인센티브를 교수들에게 지급했다.
타 병원에 비해 기본 연봉은 다소 낮지만 훨씬 높은 인센티브를 보장했기에 교수들의 불만이 없었다.
그러나 두 달전부터 상황은 급변했다. 임금은 동결됐고 연구지원비도 모두 끊겼다. 또한 인센티브제도는 사실상 할당제로 변했다.
최소한의 진료 실적을 채우지 못하면 인센티브는 커녕 연봉도 보장받을 수 없다는 뜻이다.
더욱이 교수들이 분노하는 것은 진료비 삭감이 발생하면 이에 대해 벌점을 부여하고 일정 벌점이 넘으면 연봉에서 이를 제하는 방침이 수립됐기 때문이다.
A대병원 임상교수는 "아무리 비상경영체제라고 하지만 인센티브를 모조리 몰수한 것도 모자라 진료 할당제를 시작하더니 이제는 삭감 책임까지 떠넘기고 있다"며 "교수들이 얼마나 더 버틸지 의문"이라고 귀띔했다.
이같은 상황은 비단 A대병원만의 문제가 아니다.
B대학병원은 최근 진료실적이 저조한 교수들을 사실상 귀향을 보내면서 구조조정 논란에 휩쌓였다.
진료실적이 좋은 교수들을 전면에 배치하기 위해 정년을 앞두거나 실적이 저조한 교수들을 건강증진센터나 해외의료봉사단 소속으로 좌천시켜 갈등을 빚고 있는 것.
결국 실적을 내지 못하면 아예 진료실을 없애 급여를 낮추는 방법을 택한 것이다.
이같은 경향은 청구실명제 도입이 한 몫을 했다. 교수가 직접 자신의 이름으로 처방을 입력해야 하는 만큼 환자수와 진료시간 등이 한눈에 파악 되기 때문이다.
진료에 매몰된 교수들…교육, 수련제도 붕괴
이렇듯 경영난에 몰린 대학병원들이 교수들에게 진료 수익을 압박하면서 상대적으로 대학병원 본연의 기능인 수련과 교육시스템은 사실상 붕괴 상태에 있다.
B대학병원 교수는 "과거에는 선배 교수들이 고난도 수술을 맡고 그외 수술은 후배들에게 양보하는 것이 관행이었다"며 "케이스를 많이 접해야 후배들도 스킬을 연마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하지만 요즘은 진료실적에 대한 압박이 거세지다보니 자신을 찾아온 환자는 모두 틀어쥐는 경향이 강하다"며 "결국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막내 교수들은 손가락을 빨고 있는 신세"라고 털어놨다.
이로 인해 수련시스템도 제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교수들이 수술과 외래 진료에 매진하다보니 전공의들이 소외되고 있는 것이다.
대한전공의협의회 관계자는 "최근 대학병원들이 비상경영체제에 들어가면서 전공의를 노동자로 생각하는 경향이 더욱 강해졌다"며 "무언가를 가르치기 보다는 자신의 손발을 대신할 수 있는 도구로 생각하고 있다는 뜻"이라고 꼬집었다.
결국 진료실적 압박으로 대다수 교수들이 환자 지키기에 나서면서 전공의들은 수술방에 들어가보지도 못하고 잡무만 수행하는 신세가 되어 버린 것이다.
대학병원의 존재 이유인 의대 교육 역시 상황은 그리 좋지 않다. 교육 트랙에 대한 보상시스템이 없다보니 교수들이 의대 수업에 들어가는 것을 꺼리는 모습이 역력하다.
A대병원 보직자는 "수업 한 시간 해봐야 쥐꼬리만한 수당 얼마 나오는 것이 전부"라며 "하지만 한시간 동안 진료를 하면 환자를 20명은 볼 수 있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이어 그는 "교육 트랙에 대한 보상을 늘려야 한다는데 모두가 공감하지만 병원의 입장에서 적자를 감수하고 이를 투자하기는 쉽지 않다"고 털어놨다.
펠로우 구조조정 직격탄…"대학병원 기틀 무너져"
하지만 이러한 비상경영체제로 인해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의사들은 따로 있다. 바로 임상강사, 즉 펠로우들이다.
정식 교원이라는 희망을 품고 수 년의 시간을 버텨온 그들은 그 누구보다 경영난으로 인한 직격탄을 맞았다.
교육부의 승인을 받아야 하는 교수는 구조조정이 힘들고 상대적으로 임금이 적은 전공의들은 필수적이니 중간자인 펠로우들을 정리하는 대학병원이 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빅 5병원의 4년차 펠로우 C씨는 최근 교원발령이 어렵다는 통보를 받았다. 교원 하나만을 바라보며 병원을 지켜온 펠로우 입장에서는 해고 통보와도 같다.
C씨는 "4년이나 병원에서 시간을 보냈는데 갑자기 이러한 통보를 받아 당황스럽다"면서 "사실상 직업과 꿈 두가지를 잃는 셈이 아니냐"고 토로했다.
그는 이어 "임금 동결이다 인센티브 감축이다 논란이 많지만 우리처럼 한 칼에 나가는 경우는 없지 않느냐"면서 "어찌 보면 우리가 경영난의 최대 피해자"라고 털어놨다.
상황이 이렇게 악화일로를 걷다 보니 원내에서는 대학병원의 기틀이 무너지고 있다고 한숨을 쉬고 있다.
C대학병원 원로 교수는 "지금 상황을 정리하면 한창 돈을 벌 수 있는 40~50대 교수들만 남기고 위 아래를 모두 쳐내고 있는 것"이라며 "원로 교수의 연륜과 중진 교수들의 실력, 전공의와 학생들의 패기가 어루러져 만들어내는 대학병원의 하모니가 깨진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그는 "의학교육은 그 특성상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도제식 교육이 필수적"이라며 "위 아래를 다 쳐내면 당분간 경영 수지는 나아지겠지만 대학병원의 근간이 흔들릴 수 있다"고 경고하고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