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철학자는 '타인은 지옥'이라고 표현했다. 어떤 시인은 "사람만이 희망이다"고 노래했다. 자신이 보고 싶은 대로 세상은 기묘하게 굴절될 수 있다는 말이다.
이번 인터뷰는 절망의 지옥에서 사람만이 희망이라는 깨달음을 얻은 의사들의 이야기다.
지난 11월 8일 슈퍼태풍 '하이옌'이 강타한 필리핀 사마르섬 중부지역은 그야말로 쑥대밭이 됐다. 사망자만 무려 1만 7천여명. 건물이 무너지고 농지와 주거시설도 초토화 됐다. 순간 최대풍속이 379km의 바람이 찢어놓고 할퀸 상처는 마을 풍경을 아예 '지옥'으로 바꿔버렸다.
뉴스로 피해 소식을 접하자 마자 경기도의료봉사단 조인성 단장(경기도의사회장)은 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병의원 문을 닫는 한이 있더라도 단장으로서 의료계 현안과 정책에서 벗어나 사회공헌활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는 의료인의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는 결심이 굳었기 때문이다.
의사 5명, 약사 1명, 간호사 6명, 행정직원 4명 등 총 17명의 단원이 꾸려졌다. 급한대로 28일부터 6박 7일간 일정으로 필리핀 일로일로섬 지역을 향했다. 휴가를 내고 자비를 들여 두팔 걷고 달려온 사람도 적지 않았다.
필리핀의 실상은 TV 속 화면보다 비참했다. 조인성 단장은 2011년 구호대로 참가했던 일본 쓰나미 재난사태를 떠올릴 정도로 도착한 북쪽 해안 지역의 피해는 광범위했다.
열악한 사정 탓에 합판으로 지은 집의 지붕은 다 날라가고 아예 집터만 덩그라니 남아있는 곳이 부지기수. 분위기 파악차 들린 지역 병원의 사정은 더욱 열악했다. 고작 한 명의 의사와 두 명의 간호사가 복도에 빼곡히 드러누운 70여명의 부상자와 힘겨운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다행히 사망자는 적은 지역이었지만 이재민이 대피소에 모여 있어 집단 발병의 위험이 뒤따랐다.
부랴부랴 온전한 건물을 찾아 임시 진료소를 차렸다. 수천만원 어치의 항생제와 연고 등 외용약 등을 충분히 가져온 것이 도움이 됐다. 아침부터 날이 저물무렵까지 장염이나 폐렴, 파상풍 의심 환자들의 행렬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모두가 애뜻했지만 유난히 기억에 남는 주민도 있다. 무료진료소를 찾은 한 여성은 "장염에 걸린 아기를 지역 병원에 입원시켜 치료시키고 있다"면서 "하지만 하루 치료비 200페소(약 5천원)이 없어 언제 아기가 죽을지 모른다"고 울며 매달렸다.
한 사람을 지원하는 게 과연 형평성에 맞냐는 고민도 잠깐. 결론은 봉사단원들끼리 십시일반으로 사비를 터는 것으로 모아졌다.
어머니에게는 비밀로 한 채 아기가 입원한 병원에 부탁해 진료비 대신 필요한 약을 지원해줬다. 어떻게 알았을까? 며칠 후 어머니가 건강해진 아기와 함께 다시 진료소를 찾아와 수차례 감사의 인사를 했을 때는 새로운 기운이 샘솟았다.
변변치 않은 음식으로 허기를 때우고 저녁에는 간이 침대에서 날벌레에 시달리며 쪽잠을 자는 일상이 반복됐지만 결코 힘들다는 생각이 들지 않은 이유다.
마지막 날. 작별 인사를 하고 돌아서는 단원들을 향해 지역 주민들은 연신 손을 흔들며 웃음을 잃지 않았다. 슈퍼태풍 '하이옌'도 결코 사람들의 '희망'이라는 뿌리는 뽑지 못한 것이다.
조인성 단장은 "봉사 마지막 날 기초상비약과 외상 치료약을 기부하고 왔다"면서 "우리나라가 짧은 기간 원조를 받던 나라에서 까지 올라간 것이 새삼스럽다"고 전했다.
그는 "지역은 초토화됐지만 심성이 착한 지역 주민들을 치료할 때 의사로서의 보람과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의 중요성을 느낀다"면서 "앞으로는 일회성의 단순한 봉사보다는 보건지소 만들기 프로젝트나 보건지소 인력 교육 사업 등을 강화하겠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