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들에게 취미는 어떤 의미일까. 단순히 여가를 활용하는 것에 불과할까, 아니면 좁은 진료실 안의 '나'가 아닌 내 안의 진정한 '나'를 만나는 작업일까.
부산 미래여성병원 이재준 원장에게 취미의 의미는 후자에 속한다. 산부인과 전문의인 이재준 원장은 진료실에서는 한 없이 부드럽고 꼼꼼한 의사지만 가운을 벗은 그는 진료실에서의 모습과 전혀 다른 모습이다.
검은 썬글라스에 가죽 재킷, 긴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마이크를 잡고 샤우팅을 하는 록커의 모습이 진정한 이재준 원장의 '나'이다.
이 원장은 "락은 의사에게 가장 잘 맞는 취미"라고 말한다. 그에게 락은 어떤 의미이고 의사인 자신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직접 만나 이야기를 들어봤다.
원래부터 음악에 관심이 많았나.
음악에 대해 이야기 하자면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어른들게 듣기로 내가 아주 어릴 때부터 음악소리에 반응을 잘 했다고 한다. 기억은 안 나지만 조금 더 커서는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도 곧잘 노래를 했다고 한다.
그런데 고등학교 1학년때 아버지의 사업이 실패한 이후 끼니를 때우기 어려울 정도로 집안 형편이 어려워졌고 한창 사춘기 시기였던지라 속된 말로 바지로 마당도 좀 쓸고 다니고 담배도 피는 등 방황을 많이 했다.
그때 나쁜 길이 굉장히 많았는데 유독 음악을 좋아하다보니 혼자 기타치면서 노래를 많이 불렀다. 당시 집이 고등학교 바로 옆 산쪽이었는데 사람들이 살지 않았다. 거기서 밤에 혼자 노래를 부르곤 했다.
나에게 스트레스 해소방법이 노래였고 노래를 통해 마음의 평화를 얻었던 것 같다.
방황을 접게 된 계기가 따로 있었나.
방황으로 가득했던 고등학교 1학년을 마치고 2학년에 올라가서 인생에서 가장 중요했던 선생님을 만났다. 그 선생님은 교내 문제아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선생님이었는데, 언더 그라운드의 문제아들과 지하서클을 오버 그라우드로 끌고 나와서 여행도 같이 다니는 분이셨다.
그 선생님이 고등학교 2학년때 담임이 됐는데 나에게 "니는 공부해라"라고 했던 말의 의미가 많이 와 닿았고 공부를 시작했다. 체육선생님인데도 불구하고 국영수와 관련된 모든 문제집을 모아서 주곤 하셨다. 그 선생님 덕분에 의대에 입학할 수 있었다.
본격적으로 음악을 접하게 된 것은 언제부터인가.
의대에 입학 후 신입생환영회 때 교내 그룹사운드가 공연하는데 너무 감명을 받아서 다짜고짜 찾아가 가입했다.
대학에 입학해서도 가정형편은 여전히 힘들었다. 다른 사람들이 볼 때 밴드를 하면 부르주아처럼 보이는 면도 있고 집에서도 의사가 되라고 의대 보냈는데 이상한 길로 빠지는 것이 아닌가라는 걱정도 많이 했다. 그래서 의대를 졸업할 때까지 음악하는 것을 비밀로 했었다.
의대 졸업 후 인턴과 레지던트, 공중보건의까지 마친 후에 바로 개원했다. 개원하면서 그동안 못했던 음악을 하기 위해 병원 안에 연습실과 스튜디오를 차리게 됐고 밴드도 결성하게 됐다.
현재 활동하는 밴드가 당시 결성한 밴드인가.
그렇지 않다. 밴드를 하다보면 종종 만났다 헤어진다. 서로 싫어서 헤어지는 것이 아니라 음악적 성향이 달라지면 헤어지게 되고 자신과 맞는 이들과 또 합친다. 그동안 팀을 세번 바꿨다. 현재 밴드 '리겔'은 세번째 팀으로, 1년 조금 넘었다.
밴드명 '리겔(Rigel)'이 무슨 뜻이며 어떤 의미를 담고 있나.
리겔은 오리온 자리에서 가장 밝게 빛나는 별이다. 오리온 자리에서 알파별은 베텔리우스지만, 실제 천체망원경으로 보면 리겔이 베타별인데도 더 밝아보이고 파랗게 빛나 예쁘다.
다른 사람들이 볼 때 우리가 향하는 곳이 사실은 뜬구름 잡는 것일 수도 있다.
음악이라는게 돈이 나오거나 밥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항상 좋은 소리 듣는 것도 아니지 않는가.
인간이 살아가는 목적이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자식을 낳는 것도 있지만, 하늘의 별을 바라보고 아름다움을 상상하는 것도 인간이 살아가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밤하늘의 별을 쳐다보는 것이 그런 것을 대표한다는 생각으로 밴드명을 리겔이라고 지었다.
그동안 거쳐간 밴드와 차별화되는 리겔 만의 자랑이라면.
음악적인 완성도로 볼 때 내가 원하는 음악적 완성도에 가장 근접한 팀이 리겔이라고 생각한다. 리겔 멤버들의 직업이 다들 따로 있긴 하지만 연주에 있어서는 거의 프로페셔널하다고 생각한다.
작사 작곡 능력은 물론 내가 원하는 음악적 해석의 편곡도 가능하다.
내가 가진 능력의 한계치 안에서 나를 잘 도와주고 돋보이게 해줄 수 있는, 그런 음악들을 나머지 멤버들이 주도를 해주고 있다.
음악적으로 영감을 준 뮤지션들이 있나.
고등학교 때는 나훈아 선생님의 노래를 많이 불렀다. 그 당시에 다른 친구들은 팝이나 락, 헤미메탈 등을 주로 들었다. 그러나 당시 나는 락이나 헤비메탈에는 관심이 없었다. 락은 처음 접한 신입생 환영회 때 이후로 좋아하게 됐다.
우리나라 뮤지션 중에서는 들국화의 전인권씨 좋아하고, 외국 그룹 중에서는 블랙샤바스(Black Sabbath)나 레드제플린(Led Zeppelin), 기타연주자 중에서는 잉베이 맘스틴(Yngwie Malmsteen)이나 제프백(Jeff Beck) 등 주로 고전적 음악을 좋아한다.
기억에 남는 공연이 있다면 말씀해달라.
대학교 그룹사운드 서클 후배 중에 부산 모병원 피부과 과장이 있었는데 굉장히 좋아하는 후배였다. 고등학교와 대학교는 물론 서클 후배이다보니 정말 친했다.
그런데 그 후배가 5년전 교통사고를 당해 식물인간이 됐다. 와이프는 안과의사였는데 혼자서 후배를 데리고 이 병원 저 병원을 옮겨다니면서 고생이 많았다. 그 때 성금을 모아 전달했었는데 한번 더 돕자는 의견이 모아졌다.
그 후배와의 매개가 음악을 했다는 점이 있어서 뜻이 있는 이들과 올해초 공연을 열었고 성황리에 잘 마치고 성금도 전달한 기억이 있다.
리겔은 음악적인 것으로 다른 사람에게 도움줄 수 있는 방안을 늘 고민한다. 밴드 매니저가 부산 락매니아 대표인데 그런 행사들을 많이 구상한다.
지난 2004년 처음 시작한 '도시樂콘서트'를 통해 소년소녀 가장을 도왔으며 올해 2월에는 제4회 '도시樂콘서트'를 개최해 공연수익금으로 보육원 아동 급식비를 지원했다.
락(Rock)이 의사의 삶에 어떤 영향을 준다고 생각하나.
락은 한마디로 자유라고 표현할 수 있다. 의사들은 매일 좁은 진료실 안에 갖혀 있기 때문에 폐쇄적으로 될 수 있고 자기 안에 침잠될 수도 있다.
그러나 락을 하게 되면 진료실 안에서의 여러가지 상황을 떨쳐버리고 편안하게 무대 위에 설 수 있다는 장점이 있고 그 순간만큼은 다른 사람들이 느끼지 못한 희열도 느낄 수 있다.
그래서 락이라는 취미는 의사와 잘 맞는다고 생각한다.
이런 이유로 의사 중에는 음악 좋아하는 분들이 많고 그 중에 락을 하는 이들도 많다.
부산에는 지금도 락을 하는 의사들이 몇분있다. 앞으로 그런 밴드들과 교류해서 공연을 기획할 생각이다. 그런 공연을 의사들이 본다면 조금더 적극적으로 자신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을 갖게 될 것으로 기대한다.
그러나 락은 공연예술이라는 점에서 선뜻 접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도전해야 한다. 그리고 그 틀을 벗어 던져야 한다. 나는 가장 자유롭고 편안한 대중문화가 음악이라고 생각하고 그 음악 중에서도 락이라고 생각한다.
참여 자체만으로도 상당한 카타르시스와 희열을 느낄 수 있기 때문에 의사들에게 감히 추천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