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가 뭘까. 100명에게 물어보면 99명은 하얀 가운과 청진기라고 답할 것이다.
의대 졸업 선물 1순위로 꼽힐 정도로 청진기는 의사의 상징으로 자리잡았고 오랜 세월 의사들의 목에 걸려 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의사의 상징이 사라지고 있다. 바로 아동 청소년 성 보호법 일명 아청법에 의해서다.
지난해 8월 개정된 아청법은 아동과 청소년을 보호하기 위해 제정된 법으로 그 필요성은 두말 할 나위가 없다. 특히 부쩍 늘어난 아동 성범죄를 일벌 백계 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필요한 법이다.
그러나 성범죄 하나 만으로 10년간 의료업에 종사할 수 없도록 규정한 조항은 분명 지적하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이다.
물론 환자의 신체를 접촉할 수 밖에 없는 의사에게 성에 대한 윤리는 분명 더욱 강조되야 하는 부분인 것은 분명하다.
특히 고대의대 성추행 사건과 프로포폴 사건 등 일부 몰지각한 의사들의 행위로 인해 이에 대한 안전핀이 필요하다는 여론도 무시할 수 없다.
하지만 법이 가져야할 가장 기본적인 개념인 보편성과 형평성을 고려할 때 비단 의료인에 한해 더욱 강화된 조항을 적용하는 것은 비례의 원칙에 어긋난다.
더욱이 의료기관이 아닌 장소에서 일어난 성범죄까지 문제 삼아 10년이 넘는 노력끝에 취득한 의사 면허를 사실상 박탈하는 것이 올바른 일인지는 다시 한번 돌아봐야 한다.
실제로 의료 현장에서는 이미 의료계가 우려했던 일들이 하나 둘씩 벌어지고 있다.
의사들은 여성 환자들에게 청진을 하는 것을 두려워 하고 있고 이로 인해 외래 공간에 간호사를 동석시키는 등의 방어적 태도를 취하고 있다.
더욱이 국내에서 손꼽히는 심장 명의가 여성환자는 더이상 청진을 하지 않고 무조건 검사를 보내고 있다고 고백한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일부 병원에서는 교수들보다 시비에 얽히기 쉬운 전공의들을 대상으로 청진과 촉진을 자제하라는 지침까지 내려보낼 정도니 그 두려움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만 하다.
청진은 의학이 태동한 이래 지금까지 이어져 온 가장 보편적인 진단 방법이다. 첨단 의료기기들이 범람하는 이 시점에도 의사들이 청진기를 목에 걸고 있었던 것은 그만큼 시간과 비용, 효과가 탁월하다는 방증이다.
일부 몰지각한 의사들을 막자고 마련한 법에 의해 이러한 탁월한 진단법이 의학사에서 사라질 위기다. 빈대 잡자고 초가삼간 태운다는 속담이 이만큼 잘 들어맞는 사례가 있을까.
박인숙 의원 등 일부 의원들이 이제라도 문제를 인식하고 법 개정에 나선 것은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다.
남성 환자는 청진을 하고 여성 환자는 무조건 검사를 보내는 기괴한 진료 행태를 더이상 방조한다는 것은 정부와 국회의 직무 유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