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초 방학 시작과 동시에 -아직까지 방학이라는 공증된 휴가가 주어짐에 매우 감사하며- 미국 필라델피아의 병원으로 실습 연수를 왔다.
방학이 한 달인데, 실습도 한 달. 버거우리라 견적이 나왔지만, 미국이잖아? 일단 현실을 벗어날 수 있다는 메리트가 엄청나게 매력적으로 작용하여 가볍게 버거움을 눌렀고, 나는 시험이 끝나자마자 필라델피아에 정착했다.
실습은 정신적, 신체적 모든 면에서 호락하지 않았지만 주말에는 자유 시간이 주어져서, 나와 같이 온 동기는 주말마다 여행을 하기로 했다. 장소는 뉴욕. 둘 다 뉴욕에 가본 적이 없는 촌스러운 것들이라 그곳에 대한 동경이 있었기 때문에 여행 장소 결정은 일사천리였다.
미국 드라마 '프렌즈'의 '센트럴 파크(perk)'가 있는, '그레이 아나토미'에서 맥 드리미(데릭 역, 페트릭 템프시)가 일했던 맨해튼인 그 뉴욕! 우리는 주어진 세 번의 주말 모두 뉴욕, 뉴욕, 그리고 뉴욕에 가기로 했다.
폭풍 같은 주중 일과가 끝나고 도착한 뉴욕의 첫인상은 더럽게 쾌쾌했다. 그런데 요상하게 그 쾌쾌한 것이 멋스럽다. 귀를 타고 들려오던 예쁘다, 멋지다 등의 다른 수식어에는 동의할 수 없지만 만약 누군가 '뉴욕스럽다'라고 말한다면 금방 알아챌 수 있는 특별한 향취와 자신감이 도시 전체에 스며들어 베어 나오고 있었다.
쇼핑하기도 좋고, 쉬기도 좋고, 구경하기도 좋고. 다양한 뉴욕의 모습 중 굳이 하나만 고르라면 자유로움이었다. 길거리 연주는 발에 채일 정도로 많고, 행위 예술가에, 캐릭터 분장가에, 락카 미술가 등 자유로운 영혼들이 즐비하다.
처음에는 내게 말을 걸라치면 엄마야 하고 눈을 피했는데, 금세 씨익, 웃고 지나갈 여유도 생겼다. 영어만 잘했으면 이미 하이파이브를 하며 '와쌉, 브로'도 했겠다. 이런 다양한 생각과 표현이 인심 좋게 여과되는 모습이 낯설면서도 사람이 즐겁게 사는 쉬운 방법이라 느껴져 -나는 그러지 못했고, 못하기에- 부럽다.
긴장을 풀고 눈썹을 까닥이며 뉴욕 지하철의 간이 드럼 공연을 즐기고 있는데, 문득 저 꾸질꾸질한 드럼통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무슨 말인고 하면 이거다. 병원에서 실습 학생이었던 나는 위생의 어마무시한 중요성에 그동안 잔뜩 긴장을 달고 살았다. 그것이 몸과 마음에 배어 있어서 그런지, 처음에는 쾌쾌하고 더러운 뉴욕을 피하곤 했다.
구불거리고 오래된 골목보다는 크고 차가 쌩쌩 달리고 큰 도로로만 다녔다. 그런데 적응되고 나서 보니 더럽다, 생각했던 것들이 예쁘고 특별하더라. 드럼통도 예전 같으면 피했을 텐데, 지금은 더러움과 별개의 매력으로 인해 소유욕마저 슬금 솟아오르는 것이었다.
더러운 것으로 유명한 뉴욕 지하철의 역의 타일 안내판도 마찬가지다. 우리나라 지하철만큼 깔끔하고 정형적이지도, 큼직하니 읽기 쉬운 것도 아니지만, 작은 타일들이 맞춰 들어가며 글자가 되는 것이 귀엽고 또 아기자기하니 매력 있다.
저 타일을 붙인 미장공은 담배 하나 입에 물고 노래를 흥얼거리다가 하나 턱, 지나가는 행인에게 말 걸다가 턱, 아침에 먹은 샌드위치 간이 안 맞았다며 불평하다 턱하니 붙였나갔을 것이다.
조금 비뚤어졌지만 이 정도는 괜찮다고 생각하여 생겼을 것이라 의심되는 저 라인의 울퉁불퉁함이 의외의 재미를 품을 줄은 몰랐을 것이다. 매연에 먼지에 검은 때가 묻어 더럽지만 그보다 더한 나름의 이야기가 있다.
깨알 같은 흥겨움이 가득한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가면서 멍하니 생각했다. 더러운 것과 오래되고, 낡고, 닳고, 어두운 것은 모두 다른 가치를 가지고 있는데 나는 어쩌다보니 한꺼번에 묶어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래서 뉴욕의 덮고 있는 더러움에 가려진 진짜 매력을 보지 못한 것은 아니었는지.
실은 그랬기 때문에 나는 정이 넘치고 자유롭고 오래되고 그래서 멋진 것들을 그 것들과 공존하는 더러움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피했었던 같다.
물론서로의 연관 관계를 무시할 순 없지만 모두 다르게 내포하고 있는 의미들은 존중받아야 하는 데, 나와 그리고 우리는 그동안 깨끗함의 반대에 눈이 가려 그 것들을 간과하고 있었다. 덕분에 새삼 여러 가치와 그것들의 각각의 의미에 대해 되돌아본다.
사실, 깨끗함이란 수식어도 고유 의미 외에 크고, 밝고, 최첨단이고, 속된 말로 삐까번쩍한 것들을 대표하여 꽤 많이 쓰인다. 때문에 병원 안의 나에게 깨끗함은 추구해야 하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문제는 깨끗한 것 외의 것들도 같이 한 덩어리로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게 나쁜 것은 아니지만, 그렇지 못한 것들은 더러움으로 대표되어 제대로 평가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고 하얀 대형 빌딩이 즐비한 신도시보다는 골목 사이가, 회색 계단에 80년대에 유행했을 하늘색 타일로 지어진 건물들이, 목조 가구들이 아직도 내 눈에 밟히고 편안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그런 게 아닐까, 이야기가 넘치는 매력적인 것이니까.
'깨끗한 것'에서는 느끼기 어려운 무언가가 있으니까. 감성적 아이덴티티가 충만한 그 것들은 어마어마한 것들에는 없는 매력을 가져다 준다.
뉴욕스러움. 그 것의 원동력은 우리가 흔히 표현하는 '더러움'이 큰 기여를 했다고 자부한다. 뽀득 소리가 날 것만 같은 드럼을 치는 음악가보다 연습의 흔적이 느껴지는 옴폭 패여서 테이프로 감은 다 찌그러진 블라스틱을 치는 저 사람이 더 뉴욕같고, 잘못 튀겨진 츄러스처럼 휘어진 저 소화기가 더 뉴욕같다.
그전까지 피하기만 했던 것들의 가치가 보이기 시작한다. 우리가 생각하는 그 더러운 건, 더러운 게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