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날 집으로 8년전에 누군가를 폭행했으니 형사처벌하겠다는 통지서가 날아왔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절대 누군가를 폭행한 사실이 절대 없다. 단지 누군가 나에게 맞았다는 증언만으로 나에게 사실관계조차 확인없이 처벌하겠다는 것이다.
절대 그런 일이 없다고 반박하자 검찰은 "때리지 않은 증거를 대라"는 말 뿐이다.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다.
이상은 논픽션으로, 말도 안 되고 일어날 수도, 일어나서도 안 되는 일이다. 그런데 엄연한 법치국가인 대한민국에서 이와 비슷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
최근 보건복지부는 검찰의 '범죄일람표'를 근거로, 1200여장에 달하는 리베이트 관련 '처분사전통지서'를 관련 병의원에 발송했고 이미 일선 의료기관 중에서는 통지서를 받은 곳들도 나오고 있다.
검찰의 범죄일람표는 제약사의 내부자료를 바탕으로 만든 리베이트 수수자 명단이다. 그런데 검찰은 이 명단에 적혀 있는 의료인이 실제로 돈을 받았는지, 일람표에 명시된 금액이 맞는 등을 세세하게 조사하지 않은 채 복지부에 넘긴 것으로 알려졌다.
복지부는 이것을 근거로 연루된 의료인 모두에게 처분을 하겠다고 통보한 것이다.
적법절차의 원리라는 것이 있다. 국민의 권리를 제한하는 경우 반드시 적법한 절차와 국회가 정한 법률에 근거해야 한다는 원칙이다.
검찰의 범죄일람표에 연루된 의료인 모두가 리베이트를 받았다는 것을 복지부는 어떻게 확신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그런 확신을 위해선 반드시 적법절차의 원리를 거쳤어야만 한다. 복지부가 적법절차의 원리를 지켰다면 처분사전통지서 발송 이전에 일람표에 연루된 의료인 모두에 대해 실제로 돈을 받았는지에 대한 조사가 선행됐을 것이다.
이번 통지서 발행은 이런 절차없이 범죄일람표에 의거해 이뤄졌다는 점에서 정부기관인 복지부가 적법절차의 원리를 무시하고 있다는 비난을 피하기 어려울 듯 싶다.
복지부로서는 수천명에 달하는 관계자들을 일일이 조사하기는 현재 인력으로 어렵기 때문에 검찰의 자료에 근거했다는 핑계(?)를 댈 수도 있다.
법을 지키지 않았다는 이유로 의료인을 처벌하기 위해 적법 절차를 무시하겠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
또 한가지, 통지서는 관련 의료인에게 스스로 소명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리베이트를 받지 않은 의료인이 자신이 받지 않았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기껏해야 해당 제약사 영업사원을 불러 받지 않았다는 확인서를 써달라고 부탁하는 정도에 불과할 것이다.
이마저 어려운 의료인은 앉은 채로 '경고' 처분을 당할 수 밖에 없다. 복지부는 소명 자료만 내면 경고 처분도 없다는 입장이지만 단순히 "나는 리베이트를 받지 않았습니다." 정도만으로 소명으로 인정할 것인지는 모르겠다.
복지부는 모든 의료인의 행위와 면허를 관리하는 곳이다. 복지부의 종이 한 장에 의료인의 삶이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만큼 복지부의 모든 처분은 명확한 사실과 세밀한 조사를 통해 이뤄져야 한다. 이런 노력의 뒷받침없이 검찰의 자료만으로 수천명의 의사에게 처분사전통지서를 보내는 것은 행정편의주의적인 발상에 불과하며 의료계와의 불신만 가중시키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