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공항에서 밤 10시에 만나 미팅을 하기 때문에 12박13일이라고는 하지만 1시 20분에 출발을 하니 11박 12일인 셈이다. 스페인으로 가는 길은 다양하다, 국적기를 타는 경우 스페인의 마드리드 혹은 바르셀로나로 직항하지만, 항공편에 따라서 러시아의 모스크바, 아랍에미레이트의 두바이,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에서 환승하게 된다. 이번 여행은 카타르항공을 이용하기 때문에 도하에서 환승하게 됐다.
출발 전 어머니의 49재 뿐 아니라 처리해야 할 집안 대소사 때문에 여행에 대해 차분하게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하지만 이번 여행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강했기에 여행사의 약속시간에 맞춰 인천공항으로 출발했다.
심지어 출발 당일 아침에 마드리드에 에볼라 환자가 발생했다는 뉴스도 대충 무시했다. 아프리카에서 후송된 환자의 치료에 참여했던 의료진이라고 하니, 스페인의 질병통제체계가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을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공항에서도 질병관리본부에서 나온 공무원들이 에볼라와 사스 예방에 관한 자료를 나눠 주고 있는 것을 보면 세계적인 전염성질환을 통제하는 일이 정말 큰일이 되고 있는 것 같았다.
사실 에볼라의 확산을 저지하기 위하여 국제적 협력이 요청되는 마당에 우리나라의 대응이 늦어서 국제사회에서 눈총을 받았다는 뒷이야기도 들었던 것 같다. 늦게나마 시에라리온으로 파견할 10여명의 의료진을 공모했는데 지원이 없지 않을까 하는 우려와는 달리 무려 145명이 지원했다는 최근 뉴스를 듣고 우리나라 의료인들의 인도적 지원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심야에 환승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심야 출발하는 비행기를 타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서 썰렁할 것만 같았던 공항에서 적지 않은 사람들이 탑승수속을 하는 것을 보고 놀랐다. 우리 일행을 인솔하고 여정을 같이 할 인솔자는 이봄 씨란다. 여행을 떠날 무렵 방영되던 드라마 <내 생애 봄날>에서 소녀시대 수영이 연기한 비련의 여주인공 이봄이 씨와는 달리 건강하고 씩씩한 모습이 믿음직스럽다. 하지만 겉보기와 달리 세심한 면도 있어 입국수속을 할 때나 숙소를 배정할 때는 세심한 부분까지 빠트리지 않아 불편한 점이 별로 없었다. 그리고 보니 25명이라는 일행 가운데 남성은 모두 다섯 명이다. 젊은 여성도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 여성들은 중년 이상에 여행경험들이 많은 듯 보였다. 몇몇 분들의 목소리가 유난히 크다 싶어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기는 것은 아니겠지 싶었다.
정시에 탑승절차가 시작됐다. 단체승객이라서인지 좌석들이 비행기 뒤쪽으로 몰렸다. 10시간이 조금 넘게 걸리는 비행시간이 대부분 어둠 속을 날아가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기내식이 두 차례나 나왔다. 아내는 긴장했던 모양으로 속이 불편해진 탓인지 승무원에게 약을 청하는 눈치였다. 여행에서는 건강이 최우선이라고 가이드가 나누어준 유인물에도 적혀 있던데 걱정이 들었다.
그리고 보니 주변에서는 수다가 끊이지 않는데 모두 우리나라 여성들인가 보다. '출발부터 수다로 진을 빼면 정작 구경할 때 힘이 들지 않을까?'하고 별 걱정을 다했다. 여행기를 적느라 스마트폰 배터리가 비어가고 있어 승무원에게 충전이 가능하냐고 물었더니 기내에서는 충전이 불가능하다는 답이 돌아왔다. 나중에 화장실에서 콘세트를 발견했다. 참 성의 없는 카타르항공이다.
도하의 하마드(Hamad) 국제공항에 정시에 도착했다. 맨 뒷자리라서 여유를 부리고 있는데 뒤쪽 문이 열렸다. 알고 보니 비행기를 게이트가 아닌 계류장에 정박시킨 것이다. 뒷좌석에 앉은 덕분에 일찍 비행기를 나서게 되었다. 비행기 문을 나서서 트랩에 서는 순간 더운 공기가 몸을 감싼다. 5시가 조금 넘은 시간인데 현재 기온이 30도가 넘는다던 기내방송을 실감한다.
이곳이 카타르라는 점을 실감하는 장면 하나 더. 시선이 닿는 곳 어디에도 청사건물보다 높은 건물은 물론 산과 같은 자연경관이 없다는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활주로 끝, 저 멀리 지평선이 펼쳐져 있다고 생각했는데 바르셀로나로 가는 비행기가 이륙할 때 보니 수평선이더라는 것이다. 아라비아해에 연해 있는 카타르의 하마드 국제공항이 바닷가에 있다는 것을 몰랐다.
하마드 국제공항에서 바르셀로나행 비행기를 기다리는 시간은 3시간이다. 이곳에는 처음 보는 특이한 공항시설이 있었다. 게이트마다 유리벽으로 차단된 탑승객 대기 장소가 있지만 탑승수속을 하기 전까지는 비좁은 통로에서 기다려야 한다. 하지만 비행기 탑승시간보다 상당한 여유를 두고 시작하는 탑승수속을 마치면 대기 장소에서 기다리면 된다.
비행기에 탑승하고 보니 운좋게 창가 좌석을 배정받았다. 비행기를 탈 때, 보통은 편하게 왕래하려고 복도 쪽 좌석을 선호하지만 이번에는 지중해를 내려다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얻어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실제로 비행기가 출발하고서 집에서 읽다 남긴 E.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를 다 읽고 나서야 창밖을 내다보고서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스마트폰 여행기록에는 '온 세상이 온통 파랗다. 이따금 흘러가는 구름이 마치 바다에 떠있는 유빙 같다. 그 사이로 손톱만한 배가 긴 꼬리를 끌고 지나간다.'라고 그 순간의 느낌을 적었다. 그리스 섬여행기를 담은 맹지나의 <그리스 블루스>의 표지처럼 파란 색이 펼쳐지는데, 하늘과 바다가 구분되지 않는다. 아니 하늘보다 바다가 더 파랗다. 사진의 위쪽 끝에 있는 수평선 위로 보이는 하늘이 오히려 창백해 보인다.
그래서 맹지나는 “두터운 유화물감으로 여러 번 칠한 것 같은 미르토스의 바닷물은 파도가 밀려왔다 돌아갈 때 모래사장에 진하게 푸른 자욱을 남겼다. 분명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다 가지고 돌아갈 텐데 잔상이 무척이나 짙다.”라고 적었는지 모르겠다. 그녀처럼 감성적이지 않은 필자의 느낌으로도 그 바다에 손을 담그면 파랗게 물들 것만 같다.
일본의 젊은이 시호(詩步)가 운영하는 페이스북에서 소개하는 세계의 절경들 가운데 지중해에 떠 있는 작은 섬, 람페두사의 파란 바다를 세계 사람들이 제일 좋다고 한 이유를 알 듯 하다(시호 지음, 죽기 전에 꼭 한 번 가보고 싶은 여행).
드디어 바르셀로나에 가까워지고 비행기가 기수를 낮추는 품새가 마치 바다로 뛰어드는 것 같아 절로 마음이 졸아들었다. 바닷가에 있는 엘 프라트(El Prat) 국제공항은 바르셀로나시에서 불과 14킬로미터 거리에 있고 카탈루냐 지역의 메인공항이라서인지 2012년에는 3천5백만명의 승객이 이용했다고 한다.
긴 회랑을 따라서 입국장까지 이르는 동안 영어와 스페인어 그리고 생소해 보이는 언어로 된 안내표지를 따라가면서 아마도 카탈루냐어일 것이라고 짐작했다. 스페인으로 떠날 무렵 스코틀랜드의 독립여부를 묻는 국민투표에서 독립을 반대하는 쪽이 많았다는 뉴스가 있어 유럽에는 독립열풍이 일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이곳 카탈루냐 역시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려는 움직임이 커지면서 중앙정부가 진압에 나서겠다는 등 강경한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탈루냐 주는 비공식적인 주민투표를 11월 9일 강행했고, 그 결과는 81%의 주민이 독립을 찬성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바르셀로나 시를 돌아보는 동안 시내의 모든 집들은 주정부의 깃발 에스텔라다를 걸고 있어 독립에 대한 이곳 사람들의 강한 희망을 엿볼 수 있었다.
도착한 비행기가 몇 대나 되는 듯 늘어선 줄이 기다랗게 늘어지는데도 입국신고는 달랑 3명이서만 받고 있다. 여권발급국에 따라 이들이 집중하는 정도가 다르다는 느낌이 들었다. 우리 여권은 제대로 봤는지 모르지만 질문도 없이 선선히 입국도장을 찍어준다. 입국심사관의 자세는 그 나라에 대한 첫 인상이 된다. 스페인사람들은 아무래도 여유가 많은 듯하다. <2014년 11월 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