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 야심차게 출범했던 대통합혁신위원회(이하 혁신위)의 일차적인 결과물이 13일 공청회를 통해 발표됐다. 이미 지면을 통해 알려진 대로, 당초 기대에 비해 미흡한 점이 많아 회원들의 성토가 적지 않았다고 한다.
물론 불과 4개월여 만에 의료계의 틀을 크게 바꾸는 작업이 쉽지는 않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혁신위가 출범하게 된 계기를 살펴보면 자칫 좋은 기회를 무산시키는 게 아닌지 걱정이 앞서는 것도 사실이다.
알다시피 지난 4월 14년만의 의협회장 불신임이라는 사태를 맞이해 의료계는 심각한 대립과 불화의 과정을 거쳤다. 그 직접적인 원인은 회장의 불통과 독단적인 회무 운영이었지만, 그 이면에는 의협의 낡은 의사결정 구조와 더불어 의료계의 기성 지도자들과 일반 회원들 사이의 갈등 또한 적지 않았다.
결국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편으로 의료계의 전 직역을 아우르는 혁신위를 구성해 근본적인 구조 개혁을 해달라고 주문했었다.
그러나 이번에 도출된 결과를 보면 과연 이것으로 적폐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 자못 의문이다. 세세한 항목들은 차치하고, 근본적인 개혁의 방향을 제대로 잡지 못했다고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비단 이번뿐만 아니라 지난 수 십 년간 의료계를 분열시키고 총력을 결집시키지 못한 가장 큰 원인은 지도부의 독단과 소통 실패다.
의협은 의사결정구조는 회장이 주재하는 상임이사회에 집중돼 있고, 상임이사회 역시 회장의 뜻대로 운영된다. 지금 구조로서는 이를 견제하거나 잘못된 결정을 되돌릴 방법이 거의 없다. 누가 회장으로 선출되더라도 권력이 집중되고 견제를 받지 않으면 결국 독단으로 흐르게 되어있다.
따라서 의료계의 민주적인 의사결정구조 개혁에 있어서 첫 단추는 회장에게 집중된 권력을 다양하게 분산시키는 일이다. 이에 필자는 혁신위 출범 당시 회원의 한 사람으로서 서신을 보내 이와 관련된 몇 가지 제안을 하였는데, 그 요지는 다음과 같다.
회장 중심의 상임이사회보다는 각 지역, 지역의 의견을 폭넓게 수렴할 수 있는 (전체)이사회의 권한을 강화하는 것이다. 현재 연 2회로 규정된 이사회를 연 4~6회로 늘리고, 협회의 회무·회계 상 중요한 결정이 가급적 이사회를 통해 이뤄지도록 한다.
아울러 회장을 비롯한 협회 임원의 임기를 현 3년에서 2년으로 줄여, 빠른 시대적 변화에 맞춰나가고 회장의 경우 단임제를 도입하여 재선을 신경 쓰지 않고 소신껏 일하도록 한다. 나아가 임원의 불신임 요건을 완화하여, 집행부가 회원들을 염두에 두고 일하도록 하는 것이다.
대의원회는 정원을 기존의 250명에서 300명으로 늘리는 대신, 교체대의원제를 폐지해 결격 시비를 없애고 특별한 사유 없이 불참하는 대의원은 면직한다. 늘어나는 정원만큼 회비 납부율이 높은 시도지부에 일부 추가 배정하고, 나머지는 여성이나 전공의 등의 참여 기회를 늘린다.
아울러 대의원은 가능한 직선으로 선출하고, 중임이나 연임, 겸직에도 제한을 두는 한편, 심의위원회를 현재 4개에서 6개 정도로 늘려 전문성을 강화하고 회의의 효율을 기하도록 한다.
그외 당시의 제안에는 포함되지 않았으나 회원 투표는 중요한 사안에 대해 이사회의 결정을 통해 실시하고, 회원 총회의 경우 2년에 1회 정도 정기적으로 개최해 회원들의 뜻도 반영하고 의사들의 힘을 결집할 수 있는 계기로 삼자는 것이다.
결국 이번 혁신위의 결과물은 필자의 바람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지난 수개월 간 애쓴 혁신위의 노고를 모르는 바는 아니나, 내년 의협회장 선거 및 대의원회 교체 전에 협회의 근본적인 구조 개혁을 이루기에는 만시지탄의 우려를 감출 수 없다.
그러나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른 때라는 말이 있듯이, 지금이라도 민주적인 의사결정구조를 만들 수 있도록 박차를 가해야 한다. 가능하다면 혁신위와 일반 회원들과의 만남을 추가로 열고, 의료계 내의 다양한 의견을 수렴해 보다 개혁적인 안을 도출해 내야 한다.
어쩌면 이번이 큰 갈등과 희생을 치르지 않고 의협을 개혁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지 모르기 때문이다. 혁신위를 비롯한 의료계 지도자들의 현명한 판단을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