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4일째, 전날 오후에 이어 오전 내내 버스를 탔다. 새벽 4시 반에 일어나 5시 반에 버스를 타면서 도시락을 건네받았다. 아침마저도 버스에서 해결해야 했다. 사방이 캄캄해서 날씨가 맑은지 흐린지 구별도 안 될 뿐 아니라,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가늠조차 안 된다. 뒤에 앉다보니 버스 머리가 돌아가는 대로 방향이 바뀌나 보다 할 수밖에 없다. 가끔 몸이 좌로, 우로 휙휙 돌아가는 것으로 보아 좁은 시골길을 달리는 것 같다. 일행들 대부분은 일찍 일어나는 바람에 모자란 잠을 보충하는데, 몇 분은 새벽잠이 없으신지 끝 모를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다.
스페인에서는 10월말까지 서머타임이 적용되는 탓인지 7시 반 쯤 되어서야 동쪽하늘 끝이 희뿌옇게 밝아온다. 비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은데도 흩어져 있는 구름 몇 점 때문인지 이봄 인솔자는 좋은 날씨를 기도해달라고 부탁했다. 자신이 인솔하는 여행은 대부분 날씨가 좋았다고 은근히 자신의 마법을 자랑하는 듯하면서도, '같이 여행하시는 분들이 평소 좋은 일을 많이 하신 덕분이 아니겠나 생각한다.'면서 공을 여행하는 분들에게 돌리는 센스쟁이다.
가끔씩 좌우로 뒤척이는 버스로 6시간을 넘겨 달리다 보니 창밖의 풍경도 바뀐다. 헐벗은 바위산으로 이어지던 풍경이 그라나다에 가까워지면서 나무가 울창한 산으로 변했다. 때로는 버스가 숲 사이를 뚫고 지나간다. 맑았던 하늘에 구름이 늘어난 것도 변화이다.
12시 경에 그라나다에 도착해서 구시가지에 있는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란 옛말을 실감하게 된다. 이날 점심은 연어요리였는데 전날 저녁에 먹었던 소태같이 짠 닭요리의 실패를 단숨에 만회할 정도로 맛이 있었다.
식사를 하는 동안 이 지역에서 활동하는 남성 5인조 그룹의 공연이 있었다. 그들의 노래에는 끌리는 무엇이 있었던지 노래가 끝날 때마다 박수가 쏟아지고, 일행 가운데는 그들의 노래를 담은 CD를 구입하는 분도 있었다. 점심식사를 마치고 여행의 나머지 일정을 같이 할 조형진 가이드가 합류했다. 훤칠한 키에 용모 준수한 훈남인데 말솜씨도 청산유수로 거침이 없다. 게다가 스페인 가이드에 입문하겠다는 보디가드급 제자까지 대동하여 든든한 느낌을 주었다.
알람브라(Alhambra)궁전은 그라나다 시내를 굽어보는 언덕 위에 있다. 횃불이 비치면 붉게 빛나는 성벽 때문에 ‘붉은 성(al-qala, al hamra)’이라는 아랍어에서 유래한 알람브라 궁전은 9 세기 무렵 방어용 요새로 시작됐다. 오랫동안 이베리아 반도를 지배하던 이슬람의 마지막 나스르왕조의 무함마드 1세와, 유수르1세, 무함마드 5세에 이르기(1362-1391년)까지 절정기에 있던 이슬람건축술이 만들어낸 걸작이다. 나스르왕국의 전성기였던 유수르1세 때는 왕족은 물론 귀족까지 2천명이 이곳에 살았다고 한다.
알람브라는 가장 중심이 되는 나사리에스궁전, 알카사바 요새, 스페인의 가톨릭세력이 이곳을 점령한 다음에 세운 카를로스 5세 궁전, 유수프 3세의 궁전과 정원이 있는 파르탈, 별장인 헤네랄리페 등 다섯 구역을 돌아보았다.
스페인건축을 전공한 김희곤교수는 <스페인은 건축이다>에서 알람브라 궁전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어 읽으면 많은 도움을 얻을 수 있다. 전성기에는 화려했던 건축물들도 전쟁이 끝나면 점령군에 의해 철저하게 파괴되는 것이 일반인데 도시의 한가운데 서 있는 알람브라 궁전이 이 정도로 살아남은 것은 기적이다.
나스르왕국의 마지막 왕 보아브딜은 자신의 백성을 죽이지 않는다는 조건에 더해 너무나도 소중하고 아름다운 알람브라궁전이 파괴될 것을 걱정하여 궁전을 파괴하지 않는다는 조건을 내걸고 가톨릭연합군에 투항했다고 한다. 하지만 "지나치게 아름다운 존재는 손을 많이 타는 법이지만, (알람브라 궁전은) 너무 아름다워서 오히려 파괴할 수 없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 같다."는 김희곤 교수의 해석이 옳은 느낌이다.
뒷날 카를로스1세가 알람브라궁전의 측면을 허물고 르네상스양식의 카를로스5세 궁전을 지었지만 나스르왕국을 무너뜨린 이사벨여왕의 배려로 살아남을 수 있었던 알람브라궁전도 세월이 흐르면서 스페인 사회가 혼란에 빠지면서 관리가 소홀해지면서 거지와 도둑의 소굴로 전락하고 말았다고 한다. 조형진 가이드에 따르면, 창마다 장식되어 있던 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는 도둑들이 떼어가고 두 자매의 방 근처에 있는 작은 방 천장에만 하나가 남아 있다고 했다.
1820년 미국작가 워싱턴 어빙은 이곳에 머물면서 <알람브라 이야기>를 집필했는데, 어빙이 알람브라 궁전의 가치를 재발견하고 당국에 보존을 호소했다고 한다. 1870년대에는 국가기념물로 선포되고 나서야 알람브라궁전이 복구되기 시작했고, 최근에는 알람브라궁전이 헤네랄리페, 알바이신 언덕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기에 이르렀다.
이슬람과 유대교 그리고 가톨릭이 오랫동안 동거하면서 서로에게 영향을 미친 이베리아 반도에서는 다양한 건축양식을 볼 수 있다. 먼저 로마제국이 남긴 고딕양식과 로마네스크 양식이 있고, 서고트왕국을 멸망시킨 무어인들이 이슬람건축의 영향을 받아 창조한 칼리프양식이 있다.
레콘키스타 덕분에 무어인들의 지배에서 벗어난 지역에서는 가톨릭교도들이 서고트왕국의 건축기술과 칼리프양식을 융합해 새로운 모바사베양식을 만들었으며, 12세기 이후에는 가톨릭교의 지배 아래 들어간 무어인들은 칼리프양식에 로마네스크와 고딕양식이 가미된 무데하르양식을 개발하였다. 무데하르양식의 건축물은 주로 작은 벽돌을 사용해 쉽게 건물을 짓고 석고장식과 타일과 화려한 세공장식으로 마무리된다고 했다.
알람브라는 무슬림이 781년간 이베리아반도를 지배하면서 발전시켜온 무데하르양식의 절정기에 지은 건축물이다. 알람브라궁전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은 '밤하늘 아래 성벽을 밝힌 조명등에 드러나는 서정적인 알람브라의 풍경을 건너편 알바이신 언덕에서 바라봐야'만 제대로 본 것이라고 김희곤 교수는 말한다.
알람브라궁전의 입장권에는 시간이 표시돼 있는데, 이는 나사리에스 궁전을 들어갈 수 있는 시간을 말한다.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혼잡을 막기 위해 하루 8017명에게만 입장을 허용하고, 그룹별로 5분 간격으로 입장시킨다고 했다.
26명인 우리 일행도 한 번에 입장할 수 없어 두 팀으로 나눠 입장한 다음에 같이 이동하면서 조형진 가이드의 안내를 받을 수 있었다. 입장시간이 몇 차례 변경됐는데, 현지가이드가 구입한 입장권에 표시된 시간을 맞추기 위해 직원들과 계속 협상이 진행되는 것 같았다.
시간을 맞추기 위해 카를로스 5세 궁전을 먼저 돌아봤았다. 조형진 가이드는 "알람브라궁전의 아름다움을 훼손한 흉물"이라고 극단적으로 표현하였고, 김희곤 교수가 인용한 만프레도 타푸리 역시 '마치 운석이 알람브라 궁전에 떨어진 것' 같다고 했다지만, 미완성인 이 건물은 스페인 르네상스양식의 걸작으로 스페인 왕실 건축물 가운데 보석이라고 한다.
카를로스5세는 전승을 기념하고 기독교의 통합을 기리기 위해 이슬람의 상징성이 가장 뛰어난 알람브라 궁전에 국제양식의 건물을 세우기로 한 것이다. 1527년 톨레도의 건축가 페드로 마추카가 이탈리아 건축양식을 모방하여 짓기 시작하였다. 무어인들이 내는 세금으로 짓다가 1568년 반란으로 중단돼 1923년까지 지붕이 미시공된 상태로 있다가 지금의 형태로 마무리됐다고 한다.
땅과 하늘을 상징하는 직사각형 안에 원형의 중정이 내접해 전체공간을 지배하는 2층 구조의 건물이다. 2층을 떠받치는 배흘림기둥이 원형으로 늘어서 있는데 음향의 울림이 좋아 교향악단의 정기연주회가 열리기도 한다는 것이다. <꽃보다 할배>에서는 신구씨가 중앙에 서서 소리를 질렀다가 경비원에게 쫓겨나기도 했다. 왕궁치고는 협소한 느낌이 들지만 의외로 네 귀퉁이에 상당한 공간이 숨어있다. 그래도 왕궁이라 하기에는 위엄이 많이 부족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