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 116미터 높이 76미터의 세비야 대성당은 바티칸 대성당(San Pietro Basilica), 런던의 세인트 폴 대성당(Saint Paul's Cathedral)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규모가 큰 성당이다. 12세기 후반에 지었던 이슬람사원을 부수고, 1401년에 착공하여 125년이 지나 완공을 보았다. 오랜 기간에 걸쳐 건축이 진행되다보니 고딕과 신고딕 그리고 르네상스양식이 섞여있다고 한다. 세비야대성당에는 레콩키스타를 완성한 산 페르디난도 왕을 비롯하여 중세 스페인의 왕들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다. 안치실 앞에는 무리요의 그림 「성모수태」가 있는 회의실이며, 고야와 수르바란 등의 그림이 있는 성배실이 있다.
성당 안으로 들어섰을 때 우선 엄청난 규모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튼튼한 쇠창살 안에 있는 황금빛 주제단을 보고 놀랐다. 아무래도 속물근성이 발동한 듯하다. 주제단은 80년에 걸쳐 완성한 고딕양식의 목제 제단으로 얼마나 정교한 지 사람이 만들었을까 싶다. 이들 조각들은 성서를 바탕으로 새겨졌고, 성모 마리아의 품에 안긴 예수상을 포함하여 신대륙에서 가져온 1.5톤의 황금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창살이 촘촘하게 세워진 이유를 알 것 같다. 그리고 역시 쇠창살로 보호하고 있는 수많은 미술작품과 성보들의 규모에 벌린 입을 다물 수 없다.
세비야 대성당은 하나의 거대한 미술관이었다. 어디부터 보아야 할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결국은 가이드가 이끄는 대로 따라가면서 그림과 조각들 그리고 성보들을 감상할 수밖에 없다. 성보들 가운데는 예수께서 쓰셨다는 면류관의 가시를 모셨다는 것도 있었다. 이 성보를 보면서 우리나라의 많은 절집에서 만날 수 있는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셨다는 탑이 떠올랐다면 필자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이해하실 것이다.
중앙복도 부근에 콜럼버스의 둘째 아들 페르디난드 콜럼버스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다는데 아마도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으로 모은 책을 세비야 대성당에 기증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콜럼버스의 유해는 카스티야, 레온, 나바라, 아라곤 등 가톨릭왕들이 메고 있다. 스페인에 황금시절을 가져다 준 콜럼버스를 기린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런데 오른편 뒤쪽에 있는 아라곤의 왕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 것은 콜럼버스가 처음 출항을 지원해달라고 요청했을 때 거절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재미있는 것은 앞에 서 있는 두 명의 왕들의 발 가운데 오른쪽을 만지면 부자가 되고, 왼쪽은 세비야에 다시 돌아온다고 전해진다고 하는데, 어느 쪽이 왼쪽인지 헷갈린다. 이럴 때는? 그렇다. 양쪽을 다 만지면 된다. 콜럼버스의 관 옆에 걸린 그림은 바다의 신 포세이돈을 그린 것이라는데, 아마도 뱃사람일 수밖에 없는 콜럼버스가 항상 마음에 모셨기 때문일 것이다.
콜럼버스는 1492년부터 1503년까지 네 번에 걸친 항해를 하였지만, 많은 금은보화를 얻을 수는 없었다. 따라서 처음 신대륙을 발견했을 때와는 대접이 달라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말년에 통풍으로 고생하던 콜럼버스가 1506년 바야돌리드(Valladolid)에 있는 자신의 집에서 죽었을 때 스페인의 왕들은 그의 죽음을 본체만체했다고 한다. 자신은 죽어서도 스페인 땅을 밟고 싶지 않다면서 이스파니올라(현재의 도미니카 공화국)에 묻어달라고 했다는 콜럼버스의 섭섭한 심정이 이해된다.
콜럼버스의 유해는 여러 곳을 떠돌았는데, 처음에는 바야돌리드의 공동묘지에 안장하였다가, 세비야 부근의 카르투하 수도원으로 옮겼다가 1542년에서야 그의 유언대로 이스파니올라섬의 산토 도밍고(Santo Domingo) 성당에 안장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1795년 프랑스가 이스파니올라를 점령하자 외국인의 손에 넘길 수 없다 하여, 쿠바의 아바나로 옮겼고, 쿠바가 1898년 독립하자 다시 세비야 대성당으로 옮겼다는 것이다.
콜럼버스의 유해를 가톨릭왕들의 어깨에 올려놓은 것은 다시는 스페인 땅을 밟지 않겠다는 콜럼버스의 유언을 존중한 것이라고 한다. 콜럼버스의 신대륙항로의 발견은 스페인이 영광의 시대로 향하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콜럼버스의 유해는 따로 안장되어 있고, 네 왕이 메고 있는 관은 비어있다는 이야기도 있다.
우여곡절 끝에 세비야 대성당에 안장되었다는 콜럼버스의 유해는 진짜가 아니라는 주장이 제기되어 오랫동안 시비를 가리지 못하고 있다. 도미니카공화국이 1877년 산토 도밍고의 성당을 파헤치는 과정에서 "뛰어나고 훌륭한 남성: 크리스토발 콜론 경"이라고 적힌 상자를 발견했다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납으로 된 이 상자에는 13개의 큰 뼈 조각과 28개의 작은 뼈 조각이 들어있었다는 것이다.
도미니카공화국에서는 이것이 콜럼버스의 진짜 유해이고, 스페인은 1795년 당시 다른 유해를 가져갔다는 것이다. 유전자검사를 통하여 세비야대성당에 안치되어 있는 콜럼버스 아들의 유해와 비교해보면 진위를 가릴 수 있을 것이라고 했는데, 결과가 궁금하다.
우리는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처음 발견하였다고 알고 있다. 하지만 그 다음 이야기는 잘 모른다. 콜럼버스가 스페인으로 돌아갈 때, 신대륙을 발견했다는 증거로 보여준 다음에 노예로 삼으려고 원주민들을 배에 태웠다. 그들 중 일부는 힘든 항해 때문에 배안에서 죽음을 맞았다. 뿐만 아니라 콜럼버스와 같이 왔던 선원들 가운데 일부는 원주민을 지배하기 위하여 남았는데, 이들은 원주민들을 강간하고 무자비하게 살육하였다. 결국 분노한 원주민들이 남아 있던 선원들을 모두 죽였다. 2차 항해에 나선 콜럼버스는 죽은 선원들의 복수를 위하여 살아남은 원주민을 모두 잡아다가 유럽에 노예로 팔았다는 것이다.
그밖에도 원주민들은 스페인 사람들이 가져온 천연두에 대한 면역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천연두의 대유행이 일어나 심각한 피해를 입고 말았다. 그런가 하면 스페인 사람들 역시 원주민들 사이에 퍼져 있던 매독을 유럽으로 옮겨 오랫동안 유럽사회를 공포에 떨게 했다. 세비야성당에서 만나는 알폰소10세왕은 왼손에 둥근 지구본을 그리고 오른손에는 칼을 쥐고 있다. 당시 신대륙에 대한 스페인 사람들의 인식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눈길이 닿는 곳마다 예술작품인 성당 안을 그야말로 주마간산식으로 훑어보고는, 나가기 전에 히랄다(Giralda)탑을 올랐다. 정사각형으로 된 탑의 한 변을 오르는 비탈이 한 층인데 0층에서 시작해서 34층까지 간 다음에 다시 한 층을 올라가야 하니 9층인 셈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건물로 치면 5층 정도 높이이다. 경사가 완만해서인지 그리 힘은 들지 않는다. 교황께서 이 성당을 방문했을 때는 나귀를 타고 오르셨다고 한다. 탑 안에서 나귀냄새가 나는 느낌은 그래서일까? 교황께서도 걸어서 오르셨어야하지 않았을까?
히랄다탑은 앞서 말한 것처럼 세비야성당이 들어서기 전에 있었던 이슬람 사원의 미나렛이었다. 모로코 라바트에 있는 하산2세탑과 쌍둥이탑이라고 가이드는 설명했지만, 위키피디아는 모로코, 마라케시에 있는 쿠투비아 모스크(Koutoubia Mosque)의 미나렛과 닮았다고 한다.
세비야 대성당을 건축하면서 이슬람사원의 미나렛에 가톨릭의 종탑을 얹어놓았고, 1568년에는 가톨릭의 승리를 나타내기 위하여 히랄다(El Giraldillo)라는 이름의 성모상을 올렸다고 한다. 다른 종교에 대한 예의가 아니지 싶다. 차라리 미나렛을 부수는 것이 낫지 않았을까? 무게 2톤의 성모상이 바람이 불 때 마다 돌아가는 것은 서있는 자리가 불편해서는 아닐까? 성당 문 앞에 오렌지 나무와 낮은 분수가 세워져 있는 작은 정원 역시 이슬람사원의 전통에 따른 것으로 보이는데, 가톨릭 나름의 정원을 만드는 것이 좋지 않았나 싶다.
따리파에서 점심을 먹고 세비야로 이동해서 세비야대성당, 산타 크루즈 지역을 지나 스페인광장을 보고 플라멩코공연까지 한나절로 세비야를 돌아보려니 아무래도 일정이 빠듯할 수밖에 없었던 모양이다. 이슬람교도들이 요새에 세웠다는 성, 알카사르는 구경도 못했다. 세비야 대성당 부근에 있었던가 본데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