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배가 끌어주고 후배가 밀어주는 의과대학의 오랜 '미풍양속'이 깨지고 있다. 개원 시장이 붕괴되고 봉직 시장이 과열되면서 독자 생존에 매몰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
과거 정년 퇴임 후 뜻만 있다면 언제든 자리를 찾을 수 있었던 노 교수들도 갈 곳을 잃고 방황하는 모습이다.
국내에서 손꼽히는 대형병원의 의료원장을 지낸 A교수는 최근 건강검진을 전문으로 하는 의료재단에 봉직의로 취업했다.
기획실장과 병원장, 의료원장은 물론 학회 이사장과 회장을 지내며 승승장구하던 A교수였기에 이같은 행보는 다소 의아스러운 것이 사실이다.
특히 이 의료재단이 출장검진 등을 일삼으며 의료계의 공적(公敵)으로 꼽히던 곳이라는 점에서 그의 행보에 물음표는 여전하다.
A교수가 의료원장으로 있던 대학병원의 한 교수는 "그곳에 자리는 잡는다고 해서 우리도 적잖이 놀란 것이 사실"이라며 "생각보다 오퍼가 그리 많지 않았던 것으로 안다"고 귀띔했다.
그는 이어 "그분이 그 곳으로 간 것은 상당한 의미가 있는 사건"이라며 "더이상 병원장, 의료원장 간판으로 타 병원 등에 수장으로 가는 것이 힘들어 졌다는 뜻"이라고 강조했다.
실제로 A교수 이전의 의료원장들은 타 대학의 총장이나 의료원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국내 굴지의 의료원을 이끌었던 경험이 있는 만큼 리더십을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이같은 일은 비단 A교수만의 특별한 사정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병원장 출신으로 학계에서 인정받는 B교수도 최근 지방의 한 종합병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수십년간 서울에서 생활해온 그가 지방으로 옮겨간데에 대해 여러가지 소문이 무성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 사실.
대다수 소문은 공기 좋은 곳에서 휴양삼아 소일거리를 찾아 갔다는 것이 우세했지만 속사정은 달랐다. 서울에서 특별히 제안이 오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기 때문이다.
B교수와 함께 일한 한 교수는 "가족들이 다 서울에 남고 혼자 지방으로 간 것으로 안다"며 "휴양차 떠난 것이라면 그렇게 갈리가 없지 않느냐"고 되물었다.
그는 "그나마 위신을 세우고 갈만한 자리가 거기밖에 없었던 것 아니겠냐"고 덧붙였다.
이같은 현상에 대해 일선 대학병원 교수들은 당연하다는 반응이다. 승승장구하던 대학병원들조차 비상경영체제를 선포한 마당에 과거의 영광으로 자리를 만드는 것이 힘들어 졌다는 분석이다.
특히 과거 제자나 후배들이 알아서 자리를 마련하던 풍속조차 없어지고 있다는 것이 중론. 그만큼 병원 운영이 쉽지 않아졌다는 의미다.
C종합병원 원장은 "과거에는 병원장이나 의료원장 간판이 환자 유치에 도움이 됐던 것도 사실"이라며 "또한 스승이나 후배를 모시기 위해 억지로 자리를 만드는 경우도 많았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하지만 이제는 단순히 명예만으로 자리를 보장받던 시대는 지났다"며 "종합병원으로 자리를 옮긴 노 교수들은 여전히 상당한 환자군을 움직이는 실력파 교수들"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