톨레도 대성당을 찾아가는 길에 소코트랜을 타지 않은 것은 참 잘한 일 같다. 김희곤교수는 '스페인은 건축이다'에서 톨레도에 가면 골목골목을 걸으면서 톨레도를 느껴볼 것을 권하였다. 그 이유를 들어보자.
"그 도시만의 진실을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도시의 혈관인 길을 걷는 것이다. 길을 걷다보면 길과 사람들의 영혼이 하나가 되는 순간을 포착한다. 톨레도는 도시 전체가 탁월한 조각품이며 길과 언덕과 강과 성벽과 집과 성당이 조화를 이룬 공간이다. 중세의 숨결이 오늘날까지 살아있는 화석의 도시라는 것을 인식하게 만든다. 전 세계의 어느 민족이든 톨레도의 거리를 걷는 순간 대지와 영혼의 일체감으로 도시의 일부가 되어 버린다. 500년의 시간을 유람하는 우리의 몸은 타임머신을 타고 중세의 무아지경으로 여행을 떠난다. 중세의 숨결은 오로지 걸음을 통하여 확인하는 문명의 혈관이자 지문이다."
사실 시간에 쫓기는 단체관광에서 김희곤교수의 주문을 맞추기가 쉽지는 않지만 그래도 톨레도의 골목을 누비다보면 톨레도가 영화롭던 시절이 조금은 느껴지지 않을까?
구시가지의 어디에서도 볼 수 있는 톨레도 대성당(Catedral de Santa Maria de Toledo)은 서고트시대부터 대성당이 있던 장소이다. 300년에 걸친 이슬람 지배기간에는 모스크가 있던 곳인데, 1085년 레온-카스티야의 왕 알폰소 6세가 톨레도를 함락시킬 당시 파괴되었다가, 1226년 카스티야 왕 페르난도 3세 때 다시 짓기 시작하여 1493년에 완성된 마지막 고딕양식의 건물이면서 회랑 등에는 무데하르양식이 가미되어 있다.
시의회 광장으로 열려 있는 정면으로 세 개의 출입구가 나있다. 중앙에 용서의 문이, 오른쪽에는 심판의 문이, 그리고 왼쪽에는 지옥의 문이 나 있다. 용서의 문은 교황께서 방문하시거나, 왕가의 결혼식 그리고 성체현시대가 빠져 나갈 때의 경우에만 열린다고 한다. 제일 오래된 심판의 문은 심판의 날이 왔을 때 열릴 것이므로 사람들이 출입할 수 없다. 심판의 문이나 지옥의 문은 지금까지 열려 본 적이 없다고 하는데 앞으로 절대 열릴 일이 없을 것 같다.
여행작가 윤정인은 왕궁이나 성의 내부를 보는 것에서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한다고 고백한다. 그들의 화려하고도 고귀했던 일상이 당연한 것이라 여겨졌고, 거창하게 치장한 살롱이라든가 번쩍이는 장신구들, 수많은 식기구들이 나란히 놓여 있던 왕궁 식당도 박제된 생물을 보는 것 마냥 생명력 없이 느껴졌기 때문이란다. 하지만 조 가이드는 우리들이 세속적으로 보였는지 보물실로 먼저 이끈다. 톨레도 대성당의 보물실에서 단연 눈길을 끄는 것은 성체현시대(聖體顯示臺)이다.
높이 3m의 성체현시대는 16세기 초 독일의 엔리케 아르페가 7년에 걸쳐 제작했다고 하는데, 이곳 보물실의 백미로 꼽을만하다. 콜럼버스가 신대륙에서 가져온 18kg의 금과 183kg의 은으로 섬세하게 조각한 작은 조각상 260개로 이루어졌는데, 5,600개의 조각을 12,500개의 나사로 조립하였다고 한다. 성체현시대는 매년 부활절이 지난 9주째 목요일에 열리는 성체축일인 코르푸스 크리스티 축제(Fiesta de Corpus Christi) 때, 용서의 문을 나서서 톨레도 시내를 도는 행렬에 모셔진다고 한다.
프랑드르 고딕 양식의 대제단장식 역시 장관이다. 시스네스로 추기경의 명에 따라서 27명의 최고 장인이 4년여를 중단 없이 매달린 작품으로 유럽에서 가장 정교한 장식미술 작품으로 꼽힌다. 이곳에서 눈여겨 볼 점은 컴컴하고 답답한 고딕성당의 분위기를 반전시키는 트란스파렌테이다. 대제단장식의 위쪽 천정에 구멍을 내어 자연광을 끌어들여 제단의 영적 분위기를 고조시킨 것은 18세기 화가이자 조각가이며 건축가인 나르시소 토메이다. 고딕성당에서 흔히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하여 외부의 빛을 끌어들이는 것과는 달리 트란스파렌테를 통하여 자연광을 끌어들일 수 있었던 것은 르네상스 시대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아주 화려한 제단 뒤 선반에서도 발길이 쉬이 떨어지지 않는다. 제단 뒤 선반은 르네상스의 시작으로 사라질 무렵의 고딕양식작품으로 프란시스코 데 비야플란도에 의하여 1497년 제작이 시작되어 1504년에 완성을 보았다. 성가대석과 함께 톨레도 대성당의 상징이며, 그 안에는 탄생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예수의 모습을 담고 있다. 대성당의 가운데 있는 성가대석은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아래 부분은 마에세 로드리고가 호두나무로 제작한 50개의 의자의 등받이에는 그라나다를 정복하는 장면이 세밀하게 조각되어 있다. 윗부분은 르네상스 스타일로 성인과 성자들의 모습을 상상력을 발휘하여 조각해냈다.
사제단 회의장으로 보존되고 있는 살라 카피툴라(Sala Capitular)는 시스네로스 추기경의 지시에 따라 1504년부터 1512년 사이에 네덜란드의 코피나에 의하여 만들었다. 이곳에는 후안 데 보르고나의 프레스코화로 장식되어 있는 무데하르양식의 격자천장이 아름답다. 두 줄로 배치된 초상화들은 성 유진(Saint Eugene)으로부터 시스네로스추기경에 이르기까지의 대주교들을 후안 데 보르고나가 그린 것이다.
톨레도 대성당을 나와 산토 토메교회로 가는 길에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돌아보니 톨레도 대성당의 높다란 종탑이 좁은 골목 사이로 오롯이 들어온다. 조형진 가이드가 숨겨두었다는 포토존에서 종탑을 배경으로 인증샷을 찍는다. 그리고 다시 골목길을 따라가다 보면 아담한 크기의 광장이 나타난다. 살바도르광장이다. 붉은 콘크리트 벽면을 끼고 있는 살바도르 광장에는 유서 깊은 산마르코 성당을 개조한 고문서 보관소가 있다. 중세의 낡은 성당을 개조하면서 일부 빈 공간을 콘크리트 벽체를 세워 채워 넣은 것이다. 건축가는 붉은 자갈을 사용하여 콘크리트에 붉은 색조가 자연스럽게 스며들고 세월이 흘러 풍화되어가면서 성당을 붉은 벽돌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질 것을 기대하였을 것이다.
존 러스킨은 '건축의 일곱 등불'에서 복원의 필요성이 도래할 것을 인정하면서도 복원을 이야기하지 말자고 강변했다. "그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거짓이다. 당신은 송장의 모형을 만들듯 건물의 모형을 만들 뿐이다. 그 모형은 주물이 뼈대를 갖듯, 안에 있는 오래된 벽의 껍데기일 뿐이다." 그래서 그는 복원을 말하기 전에 돌봄을 말한다. 옛 건물을 마음을 졸이며 지켜보다 느슨해진 곳이 눈에 띄면 쇠줄로 동여매고 기울어진 곳에는 버팀목을 세워야 할 것이며 배수관을 막고 있는 낙엽이나 나뭇가지를 치우게 될 것이다.
러스킨은 적군이 몰려오는 성곽의 문을 지키듯 경계를 늦추지 말라고 주문했다. 그러면 수많은 세대가 지켜볼 수 있을 것이지만 재앙의 날은 마침내 올 것이고, 그날에는 그 건물을 회상하며 장례의식을 거행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그 건물의 명예를 훼손하는 거짓된 대용품을 세우지 말고, 무너져 내린 돌은 후미진 곳에 던져두자고…
그런데도 우리는 복원에 미련을 두기 마련인가 보다. 우리는 최근 생각지도 못한 화재로 불탄 남대문을 복원하면서 무성한 뒷말을 경험하고 있기도 하다. 복원건축에 대한 건축학자 김희곤교수의 생각은 이렇다. "오래되고 낡은 건축물을 재생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역사의 그림자가 스며든 건축 재료와 공간의 구조를 조심스럽게 살펴보는 것이 먼저다. 복원은 말 그대로 원래 건축물의 구조와 재료와 마감을 있는 그대로 현대적인 기술과 공법으로 그림자처럼 살려내는 것이다. 마치 낡은 자동차를 분해하여 그 당시 엔진과 각종부품을 현대의 기술로 다시 조립하는 것과 같다."
톨레도 문화관을 개조한 건축가는 붉은 자갈을 사용하여 재료 스스로 붉은 색을 만들어내는 콘크리트를 개발해서 옛날 사용했던 붉은색 벽돌의 자연미를 살려내려고 했다는 것이다. 고풍을 간직한 톨레도가 풀어야 할 중요한 문화적 문제 가운데 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