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술방의 알싸한 느낌과 멸균 장갑을 끼고 있을 때의 감촉이 좋아 서젼Surgeon이 되기로 마음먹은 이래, 불빛을 쫓는 불나방처럼 무영등 아래서 초록색 가운을 입고 지낸 하루가 또 지나간다.
어느덧 악명이 자자한 성형외과 1년 차의 고단하고 악몽 같은 하루를 헛웃음으로 흘려보냈다. 차라리 ‘그래도 인턴이 나았지’ 하는 생각을 한두 번 해본 것이 아니다. 제대로 씻지 못해 머리가 덥수룩해져도 인식하지 못하다
환자들을 드레싱(Dressing)하거나 소독할 때 감염된다는 야단을 듣고서야 머리를 자르러 나갈 수 있었던 기억이 난다. 반추해보면 그렇게 쫓기듯 미용실 의자에 앉아 있던 30여 분 남짓의 순간이 가장 편했던 것 같다.
긴장을 풀고 미용실 의자에 앉아있다 보면 생각들이 스친다. 이발하는 동안 미용사와 이런저런 잡담을 나누다 보면 미용사라는 직업과 의사라는 직업에서 느끼는 점들이 비슷하다는 생각을 한다.
깔끔하게 해달라는 말과 함께 미용사에게 전적으로 맡기는 얌전한 손님이 있는 반면, 이런저런 요구에 맞춰 이발을 해도 또 다른 이유로 꼬투리를 잡는 ‘진상’ 손님도 있다.
의사들도 병원에서 맞닥뜨리는 환자 중에 “의사 선생님이 하라는 대로 해야죠”라고 말하는 점잖으신 분, 자기 몸에서 일어나는 합병증에도 웃으면서 “낫겠지요” 하며 의사의 불안을 덜어주는 환자들도 있는가 하면, 반대로 상세한 설명에도 못 들었다 하고 아프다고, 귀찮게 한다고, 때로는 맘에 들지 않는다고 말썽을 일으키는 환자들도 있다. 누군가를 대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들의 요구를 맞춰준다는 점에서 미용사와 의사가 비슷한 건 아닐까.
미용실의 경우 유명한 디자이너가 있거나 쾌적한 시설이 있는 미용실은 동네 미용실에 비해 몇 배 이상 가격이 비싸지만, 한국에서는 종합병원에 가나 동네 의원에 가나 진료비는 거의 차이 나지 않는다. 그러니 환자들은 종합병원에 몰릴 수밖에 없다.
서울의 종합병원에는 부산, 광주, 때로는 제주도에서 오는 환자들도 심심찮게 보게 된다. 의사들도 일을 빨리 마무리하고 집에 가고 싶은 마음이 없을까. 잔뜩 밀린 일을 겨우 마무리하고 만난 환자에게 왜 이렇게 늦었냐는 불평을 한가득 들으면 기운이 빠지게 된다.
미용실에서 이발을 마치니 막내 점원이 와서 묻어 있는 잘린 머리카락을 털어주고 머리를 헹구기 위해 안내한다. 뒤로 기대 누워 있으면 머리를 감겨주며 물은 차갑지 않은지 얼굴로 튀지 않는지를 묻고 친절한 손길로 안내해준다.
환자를 대할 때도 친절한 설명과 손길로 진료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의사의 사명이니 전문성이니 하는 거창한 표현은 하지 않아도 좋다. 내가 미용실에서 나설 때 기분 좋았던 것은 결국 이발이 예쁘게 잘 되어서 일 수도 있지만 편안하게 해준 직원들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막내 직원의 친절함이 미용실을 나서는 발길을 가볍게 했으니 우리 인턴들, 그리고 지금도 일하는 ‘청춘 의사’들의 친절함 또한 환자에게 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병원으로 들어오면서 서젼이란 말이 이발사에서 비롯되었다는 의학 역사와 연관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미용실을 나서면서 생각했던 의사들의 친절함을 유지하기가 힘들다. 사실 웃는 일보다 울고 싶은 일이 더 많은 것이 인턴이고 주치의일 수밖에 없다. 진상 환자를 겪고 나면 자기방어에 급급해질 수밖에 없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처음의 각오와 그 때의 모습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3편에서 계속>
※본문에 나오는 '서젼(surgeon, 외과의)'을 비롯한 기타 의학 용어들은 현장감을 살리기 위해 실제 에이티피컬 병원에서 사용되는 외래어 발음 그대로 사용했습니다.
이 글은 박성우 의사의 저서 '인턴노트'에서 발췌했으며 해당 도서에서 전문을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