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에서 다섯 번째로 맞는 아침이다. 휴대폰 소리에 잠에서 깼다. 시간을 보니 새벽 3시반. 알지 못하는 번호라서 전화를 끊는다. 외국여행 중이라는 안내를 들었을 터인데도 전화를 거는 이유를 모르겠다. 4시에 모닝콜을 받기고 했지만, 강행하는 일정에 30분의 꿀잠을 빼앗긴 것은 억울하다.
이날 오전 일정은 에페소스까지 가는 것이다. 가는 길에 점심식사를 했지만, 에페소스에 도착한 1시반까지 우리 일행은 두 곳의 가게에 들른 것이 전부였다. 결론적으로 쇼핑 때문에 새벽 4시에 일행을 깨워 몰고 나선 셈이다. 적지 않은 여행비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쇼핑과 선택관광에 시간과 돈을 추가로 지불해야만 하는지 돌아볼 일이다.
어둠이 막 걷힐 무렵에 들른 상점은 의류와 침구류를 취급하는 곳이다. 대체로 한 시간 가량 머물면서 상품을 구경하고 필요한 사람은 사기도 했다. 아무래도 여성들은 쇼핑에 관심이 있는 것 같다. 8시경에 다시 출발하여 가죽제품을 판매하는 상점 에페시아에 도착한 것은 11시가 조금 넘어서이다. 이곳은 흥미로운 곳이다.
상품들을 구경하기 전에 우리 일행은 먼저 런웨이가 있는 작은 방으로 안내되어 모델들이 입고 나온 가죽의상을 감상했다. 소규모 고객을 위한 특별한 쇼라선지 중간에 모델들이 객석으로 내려와서 일행 가운데 몇 사람을 골라 무대 뒤로 데려갔다. 모델들이 보여주는 패션쇼만 구경하는 것이 아니라 패션소를 직접 경험해보라는 것이다.
패션쇼 감상도 처음이었는데 팔자에도 없는 모델로 데뷔하는 일이 생겼다. 무대 뒤에서 모델이 골라주는 옷을 입고 무대에 나설 준비를 했다. 무대에서 어떻게 하는지 가르쳐주던 여성 모델이 갑자기 손을 붙잡고 돌리는 바람에 넘어질 뻔 했다. 결국 내 대신 자신이 도는 것으로 낙찰을 보았고, 중간에 싸이의 강남스타일에 맞추어 말춤도 추기로 하고 무대에 나섰다.
대학의 연극동아리에서 배역을 맡아 무대에 오를 때처럼 눈앞이 하얘지지는 않았지만 바로 눈앞에 앉아 있는 일행의 얼굴이 제대로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무대에 어떻게 걸어 나갔다가 되돌아왔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어떻든 내 차례가 끝난 다음에 출연한 아마추어 모델들을 포함한 모든 출연진들이 나와 인사를 하는 것으로 패션쇼가 끝났다. 패션쇼가 끝나고서 아내가 찍은 사진을 보니 얼굴이 가려지거나 포커스가 잘 맞지 않았다. 예쁜 모델과의 공연이라서 그랬을까?
쇼가 끝난 다음 본격적으로 가죽상품들을 구경하였다. 옛날부터 터키는 최상급의 양피지를 생산할 정도로 양가죽을 다루는 기술이 뛰어났다고 한다. 그런 기술로 만든 동물 가죽을 의복 재료로 사용하여 좋은의 가죽옷을 만들고 있었다. 다만 색깔에 대한 감각이나 패션감각에서는 우리네와 다소 차이가 있어 선뜻 사기가 뭐했다. 물론 일행 가운데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가죽옷을 구입했기 때문에 나머지 일행들이 행복할 수 있었다.
가죽옷을 구입하지 않는 사람들은 에페시아의 마법에서 풀려나 바로 옆에 있는 뷔페식당 아르테미숀으로 이동해서 점심을 먹었다. 식당의 외관이나 직원들의 복장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로마식이었다. 이식당의 점심메뉴는 지금까지의 어느 식당보다도 훌륭했다. 쇼핑 때문에 늦은 일행을 기다려야 하는 시간이 생겨 식당 밖으로 나왔다. 마침 식당 모퉁이에서 음악소리가 들려서 가보니 옛 로마시대 귀족들의 여흥을 재현하고 있었다.
프로그램의 전체 구성은 잘 모르겠으나 궁녀들의 춤에 이어지는 검투사들의 대결이 볼만 했다. 대결에서 패한 남자를 살릴 것인가 아니면 죽일 것인가를 구경하는 사람들에게 물었다. 딱히 패자를 죽여야 할 이유가 없었던 나는 당연히 엄지손가락을 세웠다. 살려주라는 이야기다. 그런데 황제가 나를 보았던 듯 패자를 살려주라면서 퇴장했다. 황제만세!
공연이 끝나면서 마침 우리도 버스를 타고서 에페소스로 향했다. 이제는 사라지고 없는 아르테미스신전이 있는 것으로 유명한 에페소스는 에게해로 흘러드는 카이스트로스(Kaystros)강 어귀에 있는 항구이다(지금은 퀴직 멘데레스강이다). 성 사도 요한의 무덤이 있는 아야솔룩 언덕에서 발굴된 주거지가 기원전 5,000년 무렵의 신석기 시대의 것이라고 고고학자들은 말한다. 기원전 2,000년 무렵에는 도시가 발달했었다는 증거들이 나오고 있는 것이다.
히타이트 사람들은 이곳을 ‘대지 어머니 여신의 도시’라는 뜻을 가진 아파샤(Apaşa)라고 했고, 먼 옛날 이곳 사람들은 ‘대지 어머니 여신’ 키벨레(Kybele)를 숭상했다. 그 키벨레 신앙은 아르테미스신앙을 거쳐 성모 마리아신앙으로 이어졌다. 에페소스라는 이름 역시 히타이트 시대의 이름 아파샤에서 유래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에페소스를 건설에 관하여 아마존의 여왕 에포스가 세웠다는 설과 아테네의 코드로스왕의 아들 안드로클로스가 세웠다는 설이 전해오는데, 대체로 안드로클로스설에 무게가 실린다고 한다.
아버지가 죽은 다음에 아테네를 떠난 안드로클로스가 델포이신전에서 정착할 곳을 물었더니, 물고기와 멧돼지가 도시를 세울 곳을 알려줄 것이라는 신탁을 얻었다. 안드로클로스가 카이스트로스강 어귀에 이르렀을 때, 마침 어부들이 식사를 하려고 굽던 물고기가 펄떡 뛰는 바람에 숯불이 숲으로 옮겨 붙어 산불이 났고, 멧돼지가 놀라 튀어 나왔다. 안드로클로스가 뒤쫓아 맷돼지를 활로 쏘아 죽이고 그곳에 도시를 세웠다는 것이다. 기원전 1,200년전 쯤의 일이다.
기원전 8세기 무렵에 이 지역에 스미르나(Smirna)라는 마을이 들어섰다고 하며, 기원전 7세기 후반에 피타고라스(Pythagoras)라는 참주가 아르테미스신전을 처음 세웠다고 한다. 기원전 560년 에페소스를 점령한 리디아의 크로이소스(Kroisos)왕은 이곳을 박해하는 대신 자금을 내어 아르테미스신전을 증축하도록 하였다. 당시 에페소스에 살던 그리스 사람들이 모시던 아테네여신을 대신하여 소아시아 토착의 아르테미스여신을 모시는 신앙의 중심지로 만들고 싶었기 때문이다.(1)
이 두 번째 아르테미스신전은 고대 세계의 7대 불가사의로 꼽혔는데, 그 목록을 작성한 시돈의 안티파트로스는 아르테미스 신전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고 한다. “나는 전차(戰車)를 위한 글이 나 있는 바빌론의 높이 치솟은 성벽을 보았고, 알페우스가 세운 제우스 신상(神像), 공중정원, 태양의 거상과 수많은 노동력으로 지은 높은 피라미드와 거대한 마우솔로스의 묘를 봤었다. 그러나 내가 구름 위에 치솟은 아르테미스의 집을 보았을 때, 그들 다른 불가사의들은 그 빛을 잃었다. 그리고 나는 말했다. ‘보라, 올림푸스를 빼면, 어떤 장대한 것에도 태양이 비추지 아니하였구나.’”(2)
그런데 기원전 356년에 헤로스트라토스(Herostratos)라는 청년이 자신의 이름이 영원히 역사에 기록될 수 있도록 아르테미스 신전에 불을 질러 파괴하였다. 우리의 국보1호 숭례문에 불을 지른 이가 아르테미스신전의 옛일을 배웠던 것일까? 마침 이날은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대왕이 태어난 날이었다. 알렉산드로스가 에페소스를 점령하였을 때, 이를 기억하고 신전에 자신의 이름을 새긴다면 건축비용을 대겠다고 제안했다고 한다. 하지만 에페소스 사람들은 이를 거절하고 자신들의 돈으로 아르테미스 신전을 화려하게 다시 세울 수 있었다. 세 번째 지은 신전도 서기 268년 서고트족의 침략으로 파괴되었다.
참고자료
(1) 유재원 지음. 터키, 1만년의 시간여행2, 15-20쪽, 책문, 2010년
(2) 위키백과. 아르테미스신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