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여행의 마지막 날이다. 전날 밤 선택관광으로 이스탄불의 야경을 즐기고 숙소에 도착한 것은 11시를 훨씬 넘긴 시간이었다. 금요일 마지막 예배를 마치고 귀가하는 사람들이 탄 차가 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교통체증을 유발하는 원인도 문화에 따라 다를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전날 밤 늦은 것도 있고, 마지막 날 일정에 여유가 있다고 해서 8시에 출발하기로 했다. 그런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모닝콜이 7시에 울리는 바람에 아침시간이 분주해지고 말았다. 짐을 빠트리지 않고 버스에 탈 수 있었던 것이 천만다행이다.
마지막 날 예정된 일정은 선택관광상품으로 돌마바흐체궁전(Dolmabahçe Sarayı)을 보고, 이어서 보스포루스 해협에서 유람선을 탄 다음에 점심식사를 하고서는 그랜드바자르를 돌아보는 것이다. 그리고는 저녁 9시20분에 떠나는 비행기를 탑승하도록 되어 있다.
돌마바흐체는 ‘정원으로 가득 찬 곳’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오스만제국의 14대 술탄 아흐메드1세(재위기간 1603-1617)가 이곳에 작은 정자를 세운 뒤로 목재 건물들이 들어서고 아름다운 정원이 만들어지면서 생긴 이름이다. 아흐메드1세 이후에 세워졌던 목재건물들은 1814년에 있었던 대화재로 모두 소실되었다.
31대 술판 압뒬메지드는 그때까지 사용해온 톱카프궁전이 유럽의 궁전들과 비교하면 호화롭거나 안락하지 않아 구닥다리처럼 보인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기울어가는 오스만제국의 위엄을 만방에 과시하기 위하여 새로운 궁전을 짓기로 결심한 것이다. 유럽제국들의 위세가 커지고 있음을 깨닫게 된 선대 술탄 마후므드2세는 자식들을 유럽으로 유학시켜 근대화된 유럽의 문물을 배우도록 했는데, 파리에 간 압뒬메지드는 당시 막강하던 나폴레옹군대에 매혹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돌마바흐체궁전이 베르사이유궁전을 모방했다는 이야기가 나오나보다.
참고로 아흐메드1세는 15세의 어린 나이에 즉위했지만, 오스만 제국의 황위 계승법을 개혁한 것은 중요한 치적으로 기록된다. 이전까지 오스만 제국의 황위 계승에 관한 원칙은 ‘새로 즉위한 술탄은 자신의 형제를 모조리 제거한다.’라는 것이었다. 4대 황제 바예지트 1세의 아들 4형제가 황위계승을 두고 10년에 걸쳐 내전을 벌였는데, 결국 옥좌를 차지한 메흐메트2세가 국법으로 정한 것이었다.(1)
메흐메트2세가 이런 결정을 내린 배경에는 자신의 경험도 있었겠지만 자식들에게 영토를 나누어주는 전통을 유지하여 단명했던 대셀주크 제국(1037년 ~ 1194년)이나 소아시아 셀주크(1077–1307)의 전례를 보았기 때문이었을 것 같다. 후계자들에게 영토를 분배하는 것은 투르크족 국가들의 오랜 관습이었다.
하지만 이 관습은 형제들 간의 유혈충돌을 불러와 나라가 망하는 요인이 되었다. 대셀주크제국의 변방에 있던 오스만공국이 불과 한 세기만에 위대한 제국으로 우뚝 설 수 있었던 것은 영토분배의 관습을 버렸기 때문이라는 설명도 있다.(2)
버스에서 내려 가이드를 따라가다 보면 4층 높이의 시계탑을 먼저 만나게 된다. 이어서 화려한 조각으로 장식된 정문을 지나면 화려한 정원에 들어서게 된다. 정원의 가운데 우아한 모습으로 조각된 일곱 마리의 백조가 물을 뿜어 올리는 분수가 있다. 분수를 지나면 돌마바흐체 궁전의 측면에 있는 출입구에 이르게 된다. 유람선을 타고서 보스포루스해협에서 돌마바흐체 궁전을 바라보면 유럽 궁전의 전통적 양식인 양편으로 부속건물을 날개처럼 거느린 모습이다. 궁전의 정면의 정원에는 술탄이 배를 탔던 정박장도 볼 수 있다.
돌마바흐체 궁전은 터키에서 가장 큰 궁전으로 4만5천 제곱미터의 넓이에 46개의 연회장과 285개의 방을 가지고 있다. 6개의 하맘과 할렘도 갖추고 있다. 1843년 돌마바흐체궁전을 짓기 시작할 무렵 오스만제국의 재정형편은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13년이 지난 1856년에야 완공을 보게 되었다. 궁정 건축가 가라벳 발얀(Garabet Balyan)이 설계한 궁전은 프랑스의 베르사유궁전이나 오스트리아의 쉔부른궁전을 모방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유럽의 바로크, 로코코, 신고전 양식에 전통적인 오스만 건축을 버무려서 새로운 양식을 만들어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3)
톱카프궁전이 이즈닉 타일과 오스만 조각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과는 달리 돌마바흐체 궁전에는 금과 수정으로 뒤덮었다고도 말한다. 특히 의전실(Ceremonial Hall)에 걸려 있는 보헤미안 스타일의 수정 샹들리에는 영국의 빅토리아여왕이 헌정한 것으로 750개의 램프가 달려있고 무게가 무려 4.5톤에 이르러 세계에서 가장 큰 샹들리에로 꼽힌다.
궁전의 내부를 장식하는데 사용된 금이 14톤 은이 40톤에 이르렀다고 하니, 돌마바흐체 궁전은 한마디로 보물이라고 해야겠다. 돌마바흐체 궁전의 내부는 사진을 찍을 수 없어 눈이 더 호사를 한 것 같다. 하지만 화려하기는 하지만 깊이가 없다고 해야 하나? 으리으리한 궁전을 구경하다보면 사용의 편리보다도 보여주기 위한 목적의 건축과 장식으로 도배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리고 아라베스크와 칼리그래피 등 이슬람 전통문양 이외에도 당시 유럽에서 유행하던 문양과 그림들을 걸어놓았다. 사람의 형상이나 인간이 만든 무엇도 장식하지 않는다는 이슬람의 전통을 버린 것이다.
압뒬메지드의 뒤를 이은 아들 압뒬라지드 황제는 돌마바흐체 궁전에서 북쪽으로 1km 떨어진 해안에 츠라안궁전을 새로 지어 사용하였고, 그의 뒤를 이은 합뒬하미드 2세 황제는 츠라안 궁전도 마음에 안든다고 가까운 이을드즈 언덕에 있던 별궁을 증축하여 만든 궁전에서 정사를 보았기 때문에 돌마바흐체 궁전은 불과 20여년 밖에 사용되지 않은 셈이다. 예로부터 제국이 망하려면 여러 가지 증후가 나타난다고 했는데 돌마바흐체 궁전이 첫 번째 징후는 아니었을까? 궁전을 구경하다보면 초대 대통령 아타튀르크가 집무실로 사용하던 작은 방도 볼 수 있다. 그의 집무실에 걸려 있는 시계는 그가 죽은 9시 5분에 세워져 있다. 아타튀르크가 오스만제국의 술탄을 꿈꾸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어쩌면 신생 터키공화국의 재정을 새로운 대통령궁을 짓는데 쓸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돌마바흐체 궁전을 나와 보스포루스다리까지 돌아오는 유람선을 탔다. 유람선 선착장으로 이동하면서 꾸물거리던 하늘이 한 두 방울 비를 뿌리기 시작했다. 결국 유람선을 타는 동안, 그랜드 바자르로 이동하는 동안 그리고 공항으로 이동하는 동안 수시로 비를 쏟아냈다. 다만 배를 타거나 버스를 타는 동안에 쏟아지던 비가 걸어서 이동하는 동안에는 거짓말처럼 멎더라는 것을 행운으로 돌려야 하나?
서울을 떠나올 때 메는 가방에 넣어 두었던 우산 두 개를 전날 밤 짐으로 부치는 가방에 집어넣었기 때문에 지금은 버스 화물칸에 실려 있으니 꺼낼 수도 없는 노릇이다. 터키를 여행하는 동안 이날까지 날씨가 화창했지만 어떻게 될지 모른다고 가방에 넣어 메고 다녔는데 정작 비가 오는 오늘은 쓸 수가 없으니 어처구니가 없다. 휴대폰 앱에 나온 일기예보가 맑을 것이라고 해서 우산을 치웠던 것인데 기상청도 믿지 않는 내가 앱을 너무 믿었나 보다. 결국 앱도 기상청의 기상정보를 이용하는 것인데 말이다. 그리고 보니 우리 가이드는 여행하는 동안 쇼핑에 관한 정보 이외에는 기상정보와 같은 소소한 정보를 제공한 적이 없는 것 같다.
참고자료
(1) 나무위키. 아흐메트1세.
(2) 쉴레이만 세이디 지음. 터키 민족 2천년 사, 애플미디어, 2012년
(3) Wikipedia. Dolmabahçe Palac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