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에즈운하와 파나마운하. 두 역사적인 건축공사를 시작한 사람은 의외로 동일 인물이다. 프랑스 외교관 출신의 F. M. 레셉스는 디벨로퍼로서 천부적 재능을 보였다.
운하 건설은 수에즈운하부터 시작된다. 19세기 후반 나폴레옹 3세는 홍해와 지중해를 가르는 통상권을 확보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집념의 사나이 레셉스는 이집트 마호메트 알리 왕조로부터 수에즈운하 개굴권을 확보해 유럽을 놀라게 했다.
1859년부터 1869년까지는 외교관에서 수에즈운하 공사책임자로 변신하여 오로지 강바닥의 흙을 파내는 일에만 전념했다. 운하 건설 교육을 받은 적은 없었지만, 8만 명의 인부를 고용했고 이들에게 식수를 제공하기 위해 낙타 3천 마리를 동원하는 열의를 보였다.
영국과 오스만튀르크 제국(지금의 터키)이 프랑스의 이런 움직임에 찬성할 리 없었다. 영국은 동방무역의 경쟁력 상실을 두려워했고, 오스만튀르크도 이집트 종주국의 위치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레셉스의 외교관 경험은 이때 빛을 발했고 두 나라의 비준을 얻어 개굴권을 확보했다.
그러나 그의 역할은 여기까지였다. 운하만 만들면 된다는 생각으로 모든 관심을 건설권 확보와 공사 그 자체에 집중했는데 공사비 조달에서 문제가 생긴 것이다.
만국수에즈해양운하회사를 만들어 액면가 500프랑의 주식 40만 주를 발행하여 2억 프랑을 확보하는 것까지는 좋았다. 지분을 44% 가진 이집트 정부가 최대주주였지만 주식 구입을 통해 누구나 자본 참여가 가능하다는 점을 간과했다. 주식회사는 당시 생소한 개념이었기에 레셉스는 지분 개념이 약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1869년 천신만고 끝에 수에즈운하가 개통했지만 초기 운하를 통과한 선박이 적어 회사재정이 파탄 나고 만다. 동방으로부터 물류가 많은 영국의 교묘한 방해공작 때문이었다. 당시 이집트 왕실은 크림전쟁으로 인해 재정운영이 힘들었다.
결국 이집트 왕실은 영국에게 주식 전체를 양도하고 영국 정부는 수에즈운하 주식회사 주식의 5분의 3을 확보하여 경영권을 갖게 된다. 이때부터 프랑스와 레셉스는 수에즈운하에서 완전히 손을 놓게 된다.
그럼에도 레셉스는 자부심으로 충만했다. 건축지식의 부족과 경영의 실패는 금세 잊었다. 수에즈운하 개통 1년 만에 아메리카로 건너가 파나마운하 건설권 확보전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레셉스는 파나마에서도 디벨로퍼로서의 역량 이외에 어떤 성공도 보여주지 못한다. 1878년 파나마운하 건설권을 확보하고 1879년 파나마운하회사를 설립하여 자금을 모아 곧바로 공사에 착수하는 과정까지, 수에즈에서 보여준 것과 같은 방식으로 업무를 진행한다.
파나마운하는 1879년 착공했다. 수에즈운하 착공으로부터 20년이 흘렀지만 신기술이나 장비 도입에 소홀했다. 수에즈 때처럼 노동력 투입 중심의 건설을 강행했다. 수에즈운하는 해면이 낮아 수평방식이 적합했다.
파나마운하 굴착지역은 해면 150m 높이라 3단계 갑문방식을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 중론이었다. 그러나 레셉스는 수에즈와 똑같은 건축방식을 택했다. 이집트는 건조한 사막기후이지만 파나마는 열대우림기후였다. 황열병으로 2만 명이 넘는 인부가 죽어나갔다. 결국 공사는 중단되었다. 공사 개시 10년 만에 진행률 10%를 넘기지 못하고 파산하고 말았다.
이후 프랑스는 수에즈운하 운영권을 영국에게 빼앗긴 것처럼, 파나마운하 건설권과 영구운영권을 모두 미국에게 빼앗겼다. 파나마 독립을 약속한다는 것이 미국의 정치적 해법이었다.
성공의 우상화, 휴브리스
"이제껏 잘해왔으니 앞으로도 잘해낼 것이다."
대학 특강에서 자주 듣는 말이다. 이는 예비 의료인의 자기 위안이다. 이전에 잘한 것이 무엇이냐고 다시 물으면 한결같이 공부라고 답한다. 성공경험은 새로운 도전에 쉽게 응하게 하지만 새 도전대에서 필승을 담보하지는 않는다. 성공경험의 성적표는 삭제의 대상이다.
레셉스는 프랑스 귀족 출신으로 부족함 없이 자랐다. 성실했으며 특히 인품이 훌륭했다고 전해진다. 포르투갈 리스본 영사와 스페인 마드리드 공사를 지낸 후 튀니지 튀니스 총영사로 있었다. 외교적으로, 정계의 흐름을 간파한 디벨로퍼로서 뛰어난 인재였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경력 전환을 위해 요구되는 역량 쌓기를 등한시했다. 기후 분석, 건축기술의 변천, 질병 연구는 본인의 영역이 아니었다. 과거대로 하면 되겠지 하는 생각으로 수에즈의 신화를 파나마에서 재현하지 못했다. 전문영역인 외교에서도 꾸준한 관리를 하지 못해 파나마에서는 정치적으로 이용되고 말았다. 연구도 부족했거니와 전문인을 활용하지도 않았다.
경영학에서는 이를 '휴브리스(hubris)'라고 한다. 휴브리스는 토인비가 사용하면서 유명해진 오만, 자기 과신이라는 뜻의 그리스어이다. 즉 '과거에 한 번 성공한 사람이 자기능력과 방법론을 우상화(偶像化)하는 과오'라는 뜻이다.
휴브리스는 창조적인 소수가 빠지기 쉽다. 예비 의료인과 같이 어떤 잣대에서건 상위권을 유지해본 자가 경험할 여지가 높다. 필자는 이를 두고 '자기자신에게만 관대할 위기'라 부른다. 잡생각이 순수한 사고를 막게 되면 한 가지 일에만 마음을 집중시키는 삼매경(三昧境)에 빠질 수 없다. 또 하나의 성공은 다른 방식을 요구하고 이전보다 더 큰 노력을 필요로 한다.
예비 의료인의 4대 위기
예비 의료인의 위기를 네 가지로 정의한다. 앞서 말한 성공이 계속될 거라는 믿음의 위기이다. 자기 우상화에 빠질 수 있다. 다음 연재에 이어질 두 번째 위기는 주변인의 대리만족에 휩쓸릴 위기이다. 본인이 정한 길인지 주변의 압력이 작용했는지 스스로도 판단이 안 선다. 그러면서 시간만 흘러간다. 후회할 때가 되면 누구의 탓인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바쁘다.
셋째, 주어진 것만 100% 완수할 위기이다. 서바이벌식 교육체계 속에서 족보문화에 익숙해진 것이 원인이다. 동일한 문제를 놓고 동료와 경쟁해서 이길 궁리만 하다 보니 주어진 업무를 해결하는 데에만 능숙하다. 네 번째는 잉여사회의 구성원으로 전락할 위기이다. 남아도는 고급 인력의 무리 속에서 갈 곳을 찾아 떠도는 현상이 생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