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주형의 '헬스케어 스타트업 리더십'
17. 자생력의 기반, 그러나 조금은 손해 보는 듣기
헬스케어 스타트업을 앞두고 '홀로 일어섬'의 길로 안내하는 자생력 확보의 기반, 네 번째 칼럼이다.
일본의 호스피스 케어 종사자에게 널리 알려진 설문 하나를 소개한다. 내․외과 전문의, 정신의학 전문의, 의대생, 그리고 간호사와 간호대 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설문이다.
질문.
호스피스 환자가 '나는 이미 손을 쓸 수 없는 상태입니까?'라고 묻는다면, 의료전문가인 당신은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보기.
ⓐ "그런 말씀 마시고 조금만 힘내세요"라고 격려한다.
ⓑ "그런 것까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라고 말한다.
ⓒ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라고 되묻는다.
ⓓ "그 정도로 많이 아프시면 그런 생각도 들 수 있어요"라고 동정한다.
ⓔ "이미 끝났어. 이런 기분이 드시는군요"라고 대답한다.
본 설문을 소개한 나카가와 요네조에 따르면 설문 결과는 직업에 따라 극명하게 나뉜다.
정신의학 전문의는 ⓔ번 선택 비중이 높았다. 정신의학 전문의를 제외한 나머지 전문의와 의대생은 ⓐ번, 간호사와 간호 대학생은 ⓒ번을 대부분 선택했다. 호스피스 케어에서는 ⓔ번에 주목한다.
ⓔ번 "이미 끝났어. 이런 기분이 드시는군요"가 얼핏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이것이야말로 환자의 말을 확실하게 받아들이고 반응했다고 설명한다.
첫인상 3초가 기업채용을 결정한다는데, 질문의 첫 대답은 대화를 이어갈지 아닐지를 결정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공감은 위로하는 연민과는 다르므로 위 설문이 실제 상황이었다면 정신과의는 환자와 대화를 이어갔을 것이고 나머지 의료전문가는 그렇지 못했을 거라 추측할 수 있다.
남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인내를 요한다. 듣는 것도 힘든데 의도를 파악하는 듣기는 더 많은 에너지를 소모한다. 그래서 의도를 파악하는 듣기는 하나의 능력이다. 돌려 말하면 상대의 이익이 무엇일지 생각하며 내가 손해 보기를 각오하는 듣기다. 순진한 발상이라고 해도 젊은 시절에는 도움이 된다.
경험 많은 사람의 이야기가 이해하기 힘들거나 지루할 때 머리 회전이 빠른 사람은 재빨리 귀를 닫는다. 계산이 투철한 사람은 꼭 들어야만 하는 이야기일까 의구심을 품는다. 손해 보는 듣기는 일방적인 독서와는 다른 생생한 분위기 속에서 의견을 청취하는 것이니 독서만큼 정제된 용어로 다가오지 않을 수 있다.
그럼에도 내 상황에 정확히 들어맞게 듣는 것은 가능하다. 그 이야기 속에서 미래감각이 생기고 나의 오만함을 밀어내며 통제력을 가지는 운을 만나기도 한다. 당장은 손해를 보는 것 같지만 우직해야 할 때가 있다. 내 역량을 집중시킬 분야를 찾아야 하는 스타트업 초기에는 특히 그렇다.
유의할 점은 있다. 의도에 긍정적인 부분만 있는 것은 아니어서 과하면 음모론적 시각에 물들게 된다. 필자 주변에 직업적으로 숨은 의도를 찾는 사람이 있었다. 그에게 다른 조직은 음모의 대상이었다. 심지어 함께 일하는 동료, 직원의 의도까지도 캐내려 했다. 이 사람과 함께 일하며 필자조차도 그 음모의 대상이 될 것 같았다. 이런 사람과 대화할 때 자신을 지키는 것은 대단한 내공이다.
귀로 색깔을 듣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 열한 살 때 완전색맹 판정을 받은 닐 하르비손이다. 소리로 보는 사람도 있다. 다니엘 키시는 생후 13개월에 시력을 상실했지만, 혀를 차서 소리를 낸 후 그 소리가 사물에 부딪혀 되돌아오는 반향을 감지해 사물을 인지한다. 귀로 소리를 듣는 것은 이보다는 쉽지 않을까. 우직하게, 조금은 손해 보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