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과대학을 졸업할 즈음, 남자들 사이에서는 군대를 미리 다녀오면 돌아왔을 때 인턴을 거치지 않고 바로 레지던트를 할 수 있으리란 이야기도 있었다. 그래서 공중보건의로 군복무 하는 것을 선택한 친구들이 있었다.
'나 인턴일 적' 이야기는 한국에서 의사로 수련받았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추억이다. 교수님들은 '나 인턴일 적' 종이와 필름으로 병원 차트를 쓰던 때, X-ray 실에 가서 X-ray 를 찾았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빠지지 않고 듣는 이야기 중 하나로 삐삐도 있었다.
예전에 마취과 인턴들이 삐삐로 호출받을 때, 가장 늦게 오는 로젯 담당 레지던트가 야식을 샀다는 '인턴 경마' 이야기도 있었다. 어떤 이야기든 지금 세대 인턴으로서는 쉽게 와닿지 않는 이야기이다.
인턴 제도가 없어진다는 소문을 들으니 인턴을 꼭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폐지될 제도의 마지막 세대로서 경험해보고 싶다는 욕심이었다.
나 역시 '나 인턴일 적 말이야'라는 이야기를 하며 향수에 젖어 볼 기회도 있지 않을까.
의대 6년을 거쳤어도 인턴을 시작하면 마치 병원에 생짜로 툭 내던져진 느낌이다. 수없이 외우고 공부했던 것들도 응급실에서 눈앞에 환자를 마주하면 머릿속이 새하얘지는 느낌이다. 아직 익숙하지 않은 바늘을 가지고 떨리는 손으로 환자 팔에 쑤욱 꽂는 새벽녘의 느낌. 인턴을 시작하면 모든 것이 맨땅에 내던져지는 느낌이었다.
인턴들은 의료진으로서 책임지는 위치가 아니다. 인턴이 잘못해도 그 잘못은 레지던트나 교수님에게 지어진다. 책임질 일이 없으니 몸은 힘들어도 마음은 힘들지 않다고 한다. 반대로 생각하면 책임질 위치에 서기까지 1년이라는 유예 기간 동안 발생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상황을 보고 배우라는 의미일 것이다.
환자를 제일 가까이에서 관찰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것이 인턴이다. 검사를 기다리는 환자 옆을 지키는 것도 인턴이다. 트랜스퍼를 따라가는 의료진도 인턴이다. 수술을 앞둔 환자와 수술을 끝낸 환자를 회복실 옆에서 보는 것도 인턴이다. 인턴에게 있어 제일의 덕목이 옵져베이션, 즉 관찰이라 한 연유를 알 것 같았다.
의사로서 환자를 치료하는 것은 기본이다. 환자의 마음을 이해하는 방법은 책으로 배울 수 없다.
환자에게는 치료도 중요하지만 병원에 입원하는 동안 혹은 수술 받기 전후 맞게 되는 자신의 감정과 변화하는 주변 상황 역시 중요하다. 환자를 보살피는 의사의 역량은 인턴 시절에 길러지는 것이다. 청춘의사들이 병과 싸우느라 약해진 환자의 감성을 경험할 수 있는 시간, 그것은 인턴 시절 1년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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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에 나오는 '서젼(surgeon, 외과의)'을 비롯한 기타 의학 용어들은 현장감을 살리기 위해 실제 에이티피컬 병원에서 사용되는 외래어 발음 그대로 사용했습니다.
이 글은 박성우 의사의 저서 '인턴노트'에서 발췌했으며 해당 도서에서 전문을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