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기기 UDI(Unique Device Identification·고유식별코드)와 제약업계에서 먼저 시행된 의약품 일련번호 제도는 여러모로 유사한 특징을 갖는다.
두 제도 모두 의료기기·의약품 관련 사건이 불거진 후 정부가 해결방안으로 추진한 점과 동시에 추후 제대로 관리가 이뤄지지 않으면 국민 안전을 위협받는 심각한 일을 초래할 수 있다는 점이다.
또 복잡한 제품 유통구조와 함께 이해당사자가 많고 제도시행을 위한 기술적 문제, 국제표준 문제, 실제 업무적용 문제들이 얽히고설켜 있다.
뿐만 아니라 정부와 업체 모두 제도시행 내용과 향후 업계에 미치는 파장을 심도 깊게 이해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
따라서 의약품 일련번호 제도 추진과정에서 불거진 문제점을 분석해보면 조만간 시행 예정인 의료기기 UDI 제도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의약품 일련번호 제도를 반면교사로 삼아 의료기기 UDI 제도를 어떻게 준비하고 정착시켜 시행해야하는지 방안을 모색해봤다.
의약품 일련번호 제도시행 과정에서 남긴 교훈
복지부는 2000년 7월 의약품에 바코드 표시를 의무화하는 제도를 시행했다.
하지만 유통과정에서 이를 활용토록 하는 정책적 사후관리가 미흡해 제약사들은 바코드가 표준에 맞지 않거나 읽히지 않으며 정보 또한 맞지 않는 등 적지 않은 오류를 겪었다.
정부는 이에 의약품 바코드 표시 및 관리요령을 개정해 2008년 1월부터 심평원에서 GS1 형식을 따르는 KD 코드를 부여하고 의약품 공급내역 보고를 하도록 했다.
또 실태 조사를 통해 바코드 오류 의약품에 대해 행정처분을 할 수 있는 근거도 마련했다.
이와 함께 심평원에서는 필요할 때마다 제약사·유통업체 등 업계 대상 교육을 실시했다.
KD 코드는 UDI의 ‘DI’(Device Identifier)에 해당하는 제품 코드만을 담고 있다.
다만 크기가 작아 바코드 표시가 어려운 15ml·15g 이하 주사제·연고제 등에 대해 바코드 부착을 의무화하는 대신 2D 바코드인 데이터메트릭스를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이후 정부는 특별한 관리가 필요한 지정의약품의 경우 2012년 1월, 전문의약품은 2013년 1월부터 유통기간과 제조번호를 추가한 GS1-128 코드를 사용토록 했다.
2015년부터는 이들 의약품에 대한 일련번호를 추가토록 했다.
이를 통해 이듬해 2016년에는 제약사, 2017년부터 도매상들도 일련번호 단위 공급내역을 제품 출하 시 보고토록 했다.
한편, 빠르게 발전한 자동인식기술인 RFID(Radio Frequency Identification)는 정부 활성화 정책에 힘입어 당시 국내에서 처음 제약사에 대규모 상용화가 이뤄졌으며 RFID 관련 국제표준 내용이 의약품 일련번호 규정에 추가됐다.
정부 또한 데이터 인식 효율성을 들어 RFID 사용 장려를 위해 제약사에 지원금을 제공했다. 이 결과 RFID 시스템을 구축하는 제약사들이 늘어났다.
RFID는 최근 많이 회자되고 있는 IoT(Internet Of Things·사물인터넷) 개념을 최초로 만들어낸 기술로 제품번호와 일련번호만을 코드로 가지고 유통기간과 제조번호 같은 부가 정보들은 모두 네트워크를 통해 접근할 수 있는 특성이 있다.
RFID를 구축한 제약사들은 지정 의약품에 유통기간과 제조번호를 코드에 사용해야 하는 2012년 이전부터 이미 일련번호 시스템을 구축해 일련번호 제도를 선행 실시하게 됐다.
하지만 RFID 기반 일련번호 시스템을 구축한 제약사들은 유통기간과 제조번호를 바코드에 인쇄하는 것에 비해 매우 복잡하고 IT시스템적으로도 의약품 생산업무 과정에서 준비할 일들이 많았기 때문에 바코드를 선택한 업체들보다 앞서 훨씬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다.
RFID 기술 역시 당시에는 매우 열악한 수준이었기 때문에 제약사 입장에서는 정부 지원금을 훌쩍 뛰어 넘는 추가비용을 시스템 추가 개발비로 부담했다.
당시 정부는 이 같은 점을 고려해 RFID 도입 제약사에 세제 혜택, 유통정보 제공 수수료 감액 및 유통단속 유예 등 혜택을 주기로 했지만 이 마저도 실질적인 도움을 주지 못한 채 흐지부지됐다.
반면 표준 바코드를 본격 의무화하면서부터 단계별 제도 시행을 목전에 둔 업계 당사자들은 매번 여러 가지 현실적인 어려움을 호소하며 제도시행 연기 또는 폐지를 주장했다.
문제는 업계 당사자들이 정부의 의약품 일련번호 제도시행 발표에도 불구하고 미온적인 태도로 일관했다는 점이다.
사전 공청회나 교육이 있을 때는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거나 또 설마 정부가 정말로 시행하겠냐는 식의 태도를 보였을 뿐만 아니라 남들도 안하는데 먼저 나서면 손해라는 이유로 제도시행 직전까지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던 것.
그러다 막판에는 준비할 시간이 없었다거나 업계 부담을 이유로 뒤늦게 수용할 수 없다는 무책임한 입장을 업계 이익단체를 통해 밝히기도 했다.
물론 업계만을 탓할 일은 아니었다.
정부는 사전에 충분히 업계 현황을 파악하지 못한 채 명확한 표준 업무 프로세스는 물론 기술적 한계와 예외 사항 등을 고려한 세부 가이드라인을 마련하지 못했다.
당연히 업계가 제기한 문제점에 대해 명쾌한 답변을 주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정부는 뒤늦게 국내외 제약사, 관련 협회, 업계 전문가 등을 모아 부족한 점을 보완하고 업계 요구를 일부 수용해 시행시기를 늦춰가며 제약사와 유통사들이 합의해 2016년까지 제약사들은 바코드 혹은 RFID를 사용해 의약품 일련번호 라벨을 부착하고 출하 시 정부에 보고토록 제도를 정비했다.
문제는 또 다시 2017년 도매 유통사들로부터 불거졌다.
이들은 제약사들이 일련번호로 고민할 때 그 파급효과를 예상하지 못했는지 당초만 하더라도 제약사들만 제대로 한다면 정부 정책에 적극 따르겠다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2017년 정작 그들이 공급 보고를 일련번호 단위로 해야 하는 시점이 도래하자 앞서 제약사들이 충실히 이행한 규정과 제도를 전면 뒤집는 주장을 펼쳤다.
더 큰 문제는 박근혜 정부시절 중요한 추진 과제였던 의약품 일련번호 관리제도가 촛불 민심으로 들어선 새 정부에서 역주행 할 위기에 놓이게 됐다.
실제로 지난 국감에서 더불어민주당 모 의원은 복지부장관에게 영세한 의약품 도매상들의 어려운 현실을 이유로 의약품 일련번호 제도를 원점에서 재검토하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이를 두고 제약업계 한 관계자는 “국회의원과 복지부장관이 유통 현장의 어려움을 살펴보고자 도매상을 방문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일련번호 관리가 가능한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가 전혀 준비되지 않은 도매상을 굳이 찾은 것은 다분히 정치적 의도가 보이는 부자연스러운 일”이라고 꼬집었다.
그러면서 “도매상 스스로가 무책임하게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아 일련번호 단위 공급내역 보고를 하지 못하는 것인데 이를 두고 도매상들이 준비되기 전까지 제도를 시행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의약품 일련번호 제도는 미국 유럽 중국 러시아 중동 아프리카 등 전 세계에서 이미 시행 중이거나 조만간 도입을 앞두고 있다.
하지만 제약업계 일각에서는 아직 다른 나라에서 시행하지 않은 제도를 왜 우리가 먼저 하느냐고 여전히 불만을 토로하고 있다.
심지어 정부가 많은 투자를 통해 다른 어떤 나라보다 앞서 기술을 개발하고 유통 투명화를 실현시킨 RFID 방식을 없애고 바코드로 바꾸라는 목소리도 있다.
이는 유통 투명화를 목적으로 기술을 도입해 업계의 철저한 관리를 유도하고자 도입한 제도가 오히려 주객이 전도돼 업계 관리가 힘드니 유통 투명화를 하지 말라는 요구와 다름없다.
일련번호 제도는 국민 건강을 위해 제약사·유통업체로 하여금 의약품 관리수준을 높일 수 있는 규정을 만들어 따르도록 한 것이다.
하지만 업계 스스로가 여러 이유를 들어 의약품 이력 추적관리에 미온적이라면 프로포콜 사망 사건과 같은 불행한 일은 되풀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의료기기 UDI 가이드라인 수립·정책 추진 강력한 의지 표명해야
의료기기 UDI 제도는 주사기 재사용 문제 해결을 위한 의료기기 이력 추적관리 필요성 때문에 도입이 추진됐다.
하지만 내막을 들여다보면, 값싼 주사기에 UDI를 통해 이력추적을 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거니와 미국 유럽처럼 당장은 의료기기 정보공유를 표준화하겠다는 것도 아닌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지금이라도 유통 이력추적을 할 수 있도록 대상 제품을 명확히 선정하고 이를 언제까지 어떤 방식으로 준비해야 하고, 또 향후 관리수준이 높아져 추가로 구축해야 하는 시스템과 예외 사항들은 어떤 것인지 중장기 세부 가이드라인을 마련해야 한다.
정부는 이를 위해 학계·업계의 다양한 전문가 도움을 받고 충분히 그들과 협의하고 토론하는 것은 물론 다양한 채널을 통한 의견수렴과 합의과정을 거쳐야 한다.
더욱 중요한 점은 의료기기 UDI 제도를 차질 없이 추진하겠다는 강력한 정책 의지를 다시금 명확히 표명해야 한다.
업계 이해당사자들도 의견수렴 과정에서 무조건 못하겠다는 문제점만을 내세울 것이 아니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현실적인 대안을 제시해야 할 것이다.
의료기기 UDI가 의약품 일련번호 제도수립과 시행과정에서 불거진 문제점을 반면교사로 삼아 최소한의 시행착오로 환자 안전관리를 실현하는 의료기기 이력추적관리제도로 정착되기를 국민들은 진정 바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