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서세동점(西勢東漸) 시대에 서양 열강들은 아시아 국가들과 여러 가지 불평등조약을 맺었는데, 경우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대개 이런 방식을 사용했다. 만약 10가지 조항이 있다면, 처음 서너 가지는 상대의 체면을 세워주는 척하면서 나머지는 열강이 내심 의도한 것들을 끼워넣었다. 전통적으로 명분을 중요시하는 아시아 국가들은 당초엔 잘된 협상이라고 만족하다가, 나중에 실리를 다 뺏긴 것을 알고는 통탄하였지만 한번 체결된 조약을 물릴 수는 없었다.
돌이켜보면 지난 20년 간 정부와 의료계의 관계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의사들은 아무래도 환자 진료의 전문가였지 정책의 전문가는 아니었고, 의료정책은 물론이고 정부의 제반 정책들을 거시적으로 꿰뚫어보는데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어떤 정책이 새로 나오면 그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끌려다니곤 했다는 것이다.
이번에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하 심평원)이 ‘경향심사’ 도입을 골자로 발표한 심사평가체계 개편안 또한 다르지 않다. 방안의 핵심은 2019년부터 차츰 기존의 건별심사에서 주제별 경향심사로 전환하고, 그 결과 전문심사 대상으로 선정된 의료기관에 대해서 ‘동료의사평가제’를 도입하겠다는 것이다. 즉 적정한 수준 내의 진료 청구에 대해서는 건별 심사를 하지 않음으로써 의료기관의 자율성을 보장하고, 전문심사가 필요한 경우도 동료의사들에게 평가를 맡기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표면적 미사여구와는 달리, 최근 심평원이 발표했던 연구보고서나 보도자료 등에서는 경향심사로 심사평가 방식을 전환하는 주요 이유는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에 따라 증가가 예상되는 진료행위를 통제하여 의료비를 절감하겠다는 것이다.
지금 건별심사의 경우 급여기준에만 부합되면 진료량이 많다고 해서 청구된 진료비를 삭감할 수 없었다. 그러나 경향심사로 전환할 경우 의료기관이나 질환, 환자 등 다양한 모니터링 지표를 설정하고, 진료 경향을 분석해 평균에서 벗어나는 경우 전문심사를 해서 삭감 및 실사 여부까지 결정하겠다는 것이다. 더욱이 그 칼을 자율성이라는 미명 하에 동료의사들에게 쥐어주어 한정된 파이 내에서 의사들끼리 치고 박는 볼썽사나운 꼴을 연출하겠다는 거다.
이러한 심사평가체계 개편은 단지 심평원차원에서만 기획된 것이 아니다. 작년 8월 급진적인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 정책, 이른바 ‘문케어’ 발표 이후 성공적 수행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고 국정 과제로서 추진되어 온 것이다. 이는 결국 진료의 하향평준화를 불러와 의료서비스의 질적 저하를 야기할 뿐만 아니라, 가치기반지불제나 성과연동지불제, 나아가 인두제(人頭制)나 총액예산제 등 오로지 진료비 통제에만 주안점을 둔 지불제도 개편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물론 의료계 역시 건강보험 심사평가체계 개편을 오래 전부터 주장해왔다. 그러나 의사들이 주장하는 개편은 의사의 전문적인 판단 존중 아래 급여기준의 합리화, 심사기준의 투명화, 이의신청제도의 간소화 등 심사평가제도의 개선(改善)이었다.
하지만 이번에 심평원이 발표한 개편안은 개악(改惡)이다. 거칠게 비유하자면 ‘우리의 소원은 통일(統一)’을 노래하는데, 우리가 원한 건 자유대한민국으로의 통일이지만, 상대가 외치는 건 고려연방제라는 셈이다.
의사들이 국민들에게 양질의 의료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서 올바른 건강보험제도가 필요하고, 그 중에서도 합리적인 진료비 심사평가제도가 더욱 필요하다. 그러나 이번 개편안은 의료계의 여망을 저버리고 의사 통제와 진료비 절감에만 초점을 맞춘 개악안이다. 일부 개선점이 있다고 해도 개악이 훨씬 더 크며, 설령 동등하다고 해도 절대 받아들일 수는 없다. 개선과 개악을 거래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