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평원과 의료계가 항생제 처방가이드라인을 제정해야 한다는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선뜻 공동연구에 나서지 못하는 이유는 뭘까.
일부에서는 2003년 의정 합의로 소화기관용약제 권장지침을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이후 유야무야된 것이 화근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보건복지부는 의료기관들이 제산제, 정장제 등을 남용하자 2002년 7월 관련약제 급여를 제한하는 요양급여기준을 고시한 바 있다.
그러나 복지부는 의료계가 강력 반발하고 나서자 의협이 자체적으로 권장지침을 마련해 시행하도록 합의하면서 고시를 철회했다.
이후 의협은 의대 교수들을 중심으로 위원회를 구성해 소화기관용약제 사용 권장지침을 마련하고, 2003년 4월 전국 의료기관에 배포했으며, 정부는 6개월간 의료기관의 사용실태를 모니터링한 후 권장지침을 심평원 심사지침으로 수용할지 여부를 결정키로 했다.
당시 소화기관용약 권장지침은 복지부와 의협이 의료계 자율로 처방가이드라인을 제정키로 한 첫 사례였다는 점에서 대단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특히 이를 계기로 향후 의료계의 처방 자율권이 더욱 신장될 것이란 기대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복지부가 심평원에 의뢰해 소화기관용약 권장지침 시행 전후인 2003년 1월부터 2004년 6월까지 월별 관련약제 처방추이를 모니터링한 결과 처방건수가 권장지침 제정 이후 오히려 늘어났고, 고가약 처방 경향이 더욱 뚜렷해진 것으로 드러났다.
의료계 스스로 처방가이드라인을 제정하고, 자율적으로 이행하기로 정부와 약속했지만 당시 의협 집행부가 신상진 회장에서 김재정 회장으로 넘어가면서 유야무야된 결과다.
이는 의료계가 약제 사용의 주도권을 잡을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놓친 것이기도 하다.
복지부 역시 심평원이 2004년 10월경 이같은 내용을 담은 모니터링 결과를 보고했지만 1년이 넘게 후속대책을 발표하지 않고 있다.
이와 관련, 심평원 관계자는 9일 “복지부가 심평원 모니터링 결과를 계속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면서도 “검토 기간이 다소 긴 것일 뿐”이라고 꼬집었다.
심평원 다른 관계자는 “2003년 정부와 의료계가 소화기관용약제 권장지침이 잘 지켜지도록 기초를 마련했더라면 항생제도 유사한 경로로 처방가이드라인이 제정되지 않았겠느냐”고 아쉬움을 토로했다.
결국 복지부와 의료계가 첫 단추를 잘못 꿰면서 뒷 단추를 꿸 염두조차 못내고 있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