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다사다난했던 한 해가 지나고 새 해가 밝았다. 또 새정부 출범을 앞두고 있어 그 어느 해보다 새해에 거는 기대가 높다. 소외된 이들의 곁을 묵묵히 지키는 의사들, 비록 비인기과 의사지만 전공을 포기하지 않고 한 길을 가는 사람들, 이들은 어떤 꿈과 희망을 안고 무자년 새해를 열어가는지 집중 취재했다.[편집자 주]
12월 21일 저녁 6시 47분 이화산부인과 분만실. 정호진(49) 원장은 또 한 명의 새 생명과 만났다.
2007년 들어 43번째 분만이다. 정 원장은 셀 수도 없이 이 순간을 경험했지만 매번 긴장되고 설레기는 마찬가지다.
특히 이번에는 산모가 예정일을 꽤 앞둔 상황에서 진통 없이 자궁이 열리고 아기의 머리가 하늘을 보고 있는 상황이어서 더욱 그랬다.
분만 직후 외래진료…바쁜 산부인과의원
분만을 마친 정 원장은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 낼 여유도 없이 외래진료실로 이동해 대기실의 환자들을 진료하기 시작했다.
정 원장은 평범한 산부인과 개원의로 혼자 외래진료와 분만을 감당하다 보니 몸이 열개라도 모자라다.
"분만은 의사 혼자의 힘으로는 절대 안되죠. 게다가 개원가에서는 더욱 그렇고요. 오랜 시간 저와 함께 한 간호사들이 아니었다면 분만은 생각도 하지 못했을 거에요."
산부인과 개원의로서 단 한번도 분만에 대해 손을 놓아본 적이 없다는 정 원장은 그간의 수고를 직원들에게 돌렸다.
실제로 그의 병원에는 15년을 함께 한 간호사부터 8~9년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는 간호사까지 대부분 장기근속 직원으로 서로 끈끈한 신뢰를 이어나가고 있다.
2~3년 전 산부인과병원에서 개원가로 옮겨 외래와 분만을 병행하게 되면서 분만 건수가 줄었다는 아쉬움이 있지만 그는 오히려 여기서 느낄 수 있는 장점을 부각시켰다.
"한달 평균 분만 건수가 3~4건. 분만이 더 늘었으면 하는 생각은 여전하지만 한편에서는 산모 개개인을 각별히 생각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어요."
"산과의사로서 분만은 버리기 힘든 사명감"
정 원장이 분만을 놓지 않는 이유는 간단하다. 산부인과의사라는 정체성을 놓지 않고 싶어서다.
외래진료를 받던 산모들이 분만을 원할 때 해줄 수 없는 상황이라면 산부인과의사로서의 사명감을 느낄 수 없을 것 같다는 얘기다.
또한 외래진료를 받던 환자들이 분만할 때 혹은 임신과 관련해 무슨 일이 생겼을 때마다 자신을 찾아오는 환자들을 보며 보람을 느낀단다.
"요즘 어렵다고들 하지만 자신을 믿고 따라주는 환자가 있으면 아마 분만을 접지는 않을 거에요. 다행히 지금까지 큰 의료사고 없었고 저를 믿어주는 환자들이 있어 지금의 제가 있는 거겠죠."
이런 까닭에 그는 휴일에도 야간에도 항상 대기상태다. 언제 어디서라도 자신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환자에게 연락이오면 그 자체가 그에게는 보람이고 행복이라고.
불과 2~3년 전 분만을 주로 했을 때만해도 야간에 잠을 자던 중 아기를 받기 위해 병원으로 뛰어간 일이 한두 번이 아니다.
한 번은 병원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나가있는 중에 연락을 받고 급히 이동하다가 접촉사고를 냈다. 그건가 하면 아파트 단지 내 정문이 닫쳐있어 한걸음에 병원까지 달려간 일도 있다.
야밤에 병원으로 뛰쳐나가는 일에 고될 법도 하지만 그때마다 그는 오히려 자신을 필요로 하는 환자들을 보며 새삼 산부인과의사가 되길 잘했구나 되새김질 한다.
환자와 라포르 형성으로 경쟁력 높인다
대형 산부인과병원을 선호하는 분위기 속에서도 그를 찾아오는 산모들이 끊이지 않는 것은 결국 환자와의 라포르 형성에 있다.
정 원장은 대형 산부인과와 비교할 때 규모는 작지만 분만 건수가 낮아 산모 개개인의 사생활 보호는 물론 세심한 부분까지 챙겨줄 수 있다는 점은 장점으로 삼고 있다.
이화산부인과의 장점은 또 있다. 아기를 낳은 후 자연스럽게 모자동실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 대형병원에서는 쉽지 않은 일이지만 이곳에서는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이상적인 산부인과의 모습이다.
산모식 또한 특별하다. 모든 식재료가 정 원장의 고향에서 공수해 오기 때문이다. 게다가 한 달에 산모가 서너명 정도에 불과해 특별히 신경 쓴 산모식이 제공될 수 밖에.
"대형 산부인과와의 경쟁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는 요소는 환자를 진심으로 대하고 그들의 사생활을 철저히 보장해주는 거죠. 이런 점들을 부각시킨다면 개원가에서도 얼마든지 산과의사로서 분만을 유지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이어 정 원장은 내년에는 보다 많은 동료 개원의들이 소신진료를 할 수 있게 되길 소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