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하나의 의약품도 약이라는 이름을 달고 약국 밖으로 나갈 수 없다."
"24시간 운영이 가능한 한정적인 장소에서 야간 및 공휴일에도 의약품을 구입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고자 한다."
대한약사회(회장 김구)가 불과 한달만에 입장을 선회했다.
하나의 의약품도 약국외 판매는 안 된다고 목소리를 높이다가 한정적인 장소에서 의약품을 구입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겠다는 방향으로 입장을 바꾼 것.
23일 약사회는 "국민의 안전한 의약품 사용을 전제로 취약시간대 의약품 접근성 향상을 위한 국민 불편 해소방안에 대해 보건복지부와 협의를 진행하고 있다"고 깜짝 발표 했다.
복지부도 "국민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필수 상비약의 편의점 판매를 수용한 약사회의 어려운 결정에 환영한다"고 화답했다.
일각에서는 전폭적인 약사회의 심경 변화 배경을 둘러싸고 의구심을 키워가고 있다.
대응 카드 없는 약사회…여론 압박에 굴복?
일각에서는 여론의 압박에 약사회가 굴복했다는 말들이 나오고 있는 상황.
국민 여론 악화에도 불구하고 이를 타개할 대응책 마련이 어려웠다는 점에서 가정상비약 슈퍼 판매는 당연한 수순이라는 분석이다.
실제로 약사회는 심야응급약국의 부실 운영 문제로 한동안 도마 위에 올랐으나, 마땅한 해결책 제시에 실패했다.
심야응급약국을 유지하려면 회원들의 '희생'을 전제로 해야 한다는 점에서 회원들의 참여가 저조했고, 이를 유지하기 위한 집행부의 부담도 적지 않았다.
현행 당번 약국으로는 여론 무마가 힘들다는 점에서 약사회의 가정상비약 슈퍼 판매 허용은 '대승적 차원'에서 당연한 수순이라는 것이다.
2분류 유지 '발등의 불'…사활 건 이유는
반면 이를 2분류 체계를 지키기 위한 약사회의 전략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약사회는 이번 발표에서 "현행 의약품 분류체계를 유지하면서 안전 사용이 가능한 최소한의 필수 상비약에 한해야 한다"고 방점을 찍었다.
당초 정부가 내놓은 약사법 개정안은 전문약-일반약-약국 외 판매약의 3분류 체계로 일반약 슈퍼 판매를 뒷받침하고 있다.
약사회가 부담을 느낀 부분은 바로 '약국 외 판매약'의 신설.
현행 전문약과 일반약의 2분류 체계에서 '약국 외 판매약'의 분류가 새로 신설되면 본격적인 약국 외 판매약 논의가 진행될 수 있다는 부담이 적지 않다.
특히 가정상비약 슈퍼 판매에 대해 약사회가 반대의 명분으로 내세웠던 '부작용' 사례가 우려만큼 크지 않다고 판명될 경우 전면적인 일반약 슈퍼 판매 요구 주장도 나올 수 있다.
이에 부담을 느낀 약사회가 복지부와의 협의 끝에 2분류 체계를 유지하면서 장관이 고시하는 일부 의약품을 편의점 등에서 팔 수 있도록 허용하는 '묘안'을 내놓은 것이 아니겠냐는 것.
실제로 약사회의 발표가 나오기 무섭게 복지부가 개정안의 3분류 체계 대신 2분류 유지하겠다는 방침을 발표한 것도 이런 주장을 뒷받침한다.
일반약 슈퍼 판매를 주장한 시민단체들은 벌써부터 약사회의 2분류 체계가 '꼼수'에 불과하다고 우려섞인 목소리를 내고 있다.
가정상비약 시민연대 조중근 대표는 "3분류 체계로 약사법을 개정하지 않고, 현행 2분류인 의약품 분류 체계로 가정상비약 슈퍼 판매를 하겠다는 것은 일시적인 방편이다"며 "근본적이 해결책이 될 수 없다는 점을 지적해 두고자 한다"고 선을 그었다.
복지부-약사회 '동상이몽'…약사회 내홍 조짐도
가정상비약 품목과 판매 장소 결정은 향후 논란이 될 전망이다.
복지부는 "국민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필수 상비약의 편의점 판매를 수용한 약사회의 어려운 결정에 환영한다"고 밝혔지만 약사회는 "아직 결정된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신중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약사회 관계자는 "편의점 판매는 확정된 것이 아니다"면서 "상비약 품목 역시 협의를 해 나갈 부분으로 큰 틀에서 일부 가정상비약의 약국 외 판매만 결정된 것"이라고 확대 해석을 경계했다.
23일 약사회는 약사회관 4층 동아홀에서 제6차 이사회를 갖고 가정상비약 약국외 판매와 관련된 논의를 했지만 큰 입장 변화는 없었다.
한편 약사회의 입장 변화에 따른 약사회 내부의 내홍 조짐도 감지되고 있다.
경기도약사회 산하 31개 시군구약사회장은 23일 성명에서 약사회의 가정상비약 편의점 판매 공식화에 따라 약사회 무용론을 제기할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약사의미래를준비하는모임' 역시 "6만 회원의 뜻을 거스른 김구 이하 대한약사회 집행부는 즉각 사퇴하라"며 맞서고 있어 집행부의 가정상비약 목록과 판매 장소 협의에 따른 대회원 설득이 관건으로 떠오를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