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핵과가 존폐 위기다. 물질적인 풍요로움과 의학 발전으로 결핵환자가 감소하면서 결핵과 또한 자연스럽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처지다.
어느 순간부터 호흡기내과가 결핵과를 대신하고, 정부는 결핵과를 호흡기내과로 흡수시킬 계획을 세우고 있다.
결핵과 역사의 마지막 페이지를 써내려가고 있는 서울시립서북병원 서해숙 과장(50·결핵과)을 만났다.
"사람들은 요즘도 결핵으로 죽는 사람이 있냐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지만, 꽤 있어요. 그것도 생각보다 많이요."
그가 털어놓은 결핵환자의 실상은 최첨단 의료기기가 쏟아지고 신약 연구가 한창인 현재와는 상당히 동떨어져 있었다. 또 어떤 드라마보다 절절했다.
"선생님, 저 이제 괜찮은 거죠? 혹시라도 더 심각해졌을까봐 걱정했어요." "걱정은 왜 했어요. 내가 괜찮을거라고 했잖아요. 약 잘 챙겨먹고…"
환자와 밝게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던 서 과장은 병실을 나서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저 환자 괜찮아 보이죠? 사실 폐가 반밖에 안남았어요. 내성이 심해서 약이 잘 듣질 않아요. 이제 20대 초반인데…그래도 참 밝아서 다행이에요."
"선생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참, 혈당 수치를 확인했더니 너무 높은데요? 당뇨약 좀 처방해 주세요."
회진 중에 복도에서 만난 50대 여성환자는 서 과장을 보자마자 반갑게 말을 건넸다. "저 환자는 매일 울어요. 폐가 반도 안남았죠. 당뇨까지 있어서 걱정이죠. 빨리 치료해주고 싶은데 이미 내성은 생겼고…가슴이 아파요."
환자를 대하는 그는 의사라기 보다는 심리상담사에 가까워보였다. 환자 한명 한명의 가족사는 물론 환자의 심리상태를 누구보다 잘 파악하고 있었다.
그에게는 생각만 하면 마음이 쓰이는 환자가 있다. 그 환자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기 전부터 그는 눈시울을 붉혔다.
그가 서북병원에서 결핵환자 진료를 시작한 지 20여년째. 수많은 환자가 그를 거쳐갔지만 얼마 전 세상을 떠난 여성환자에 대한 기억은 어제 일처럼 또렷하다.
"5년전 쯤 병원에 처음 찾아왔던 여자 환자인데 똑소리 났죠. 성격도 적극적이고 5년 내내 병원에 입원해 있다보니 터줏대감 역할을 했어요. 병원에 올 때만 해도 20대 중반에 참 예뻤는데 안타까워요."
그는 그렇게 한참을 그 환자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가 미혼인 줄 알았는데 기혼으로 자녀도 있었고, 결핵을 앓으면서 이혼했고, 어린 시절 편부모 슬하에서 자라 불우한 청소년기를 보냈다는 등 오래 사귄 친구처럼 모든 것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5년간 병원에서 얼굴 맞대고 지낸 시간이 있다보니 의사와 환자라기 보다는 자매처럼 느껴지더라고요. 그 환자가 세상을 떠나고 한달간은 가슴 한켠이 시린 게 마음이 쓰이더라고요."
그는 결핵치료만큼 환자들의 상처받은 마음을 치료하는데 신경을 쓰고 있다.
그는 가끔 해질녁이면 환자들을 모아놓고 음악을 들려주며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털어놓으며 서로 위로하는 시간을 마련한다.
"다른 병원에서 마음 고생한 환자들이 많아요. 격리 시켜야 할 대상으로만 보니까 아프다는 얘기도 제대로 못하죠. 특히 가족에게까지 버림받은 환자들은 상처가 크죠. 어쩌면 이들에게는 마음의 병을 치료해주는 게 더 중요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지난 3일, 다시 찾아간 서 과장은 다소 들떠 있었다. 얼마 전 23세의 딸과 사위가 생겼기 때문이다.
"탈북 여성환자가 있었는데 어느날 청첩장을 주면서 결혼식장에서 엄마 역할을 부탁하더라고요. 혈혈단신 한국에서 아는 사람이라곤 주치의인 저 밖에 없다면서요."
그는 흔쾌히 승낙했다. 서 과장의 남편은 북한에 있는 그녀의 아빠를 대신해 결혼식장에 함께 걸어들어가는 역할을 맡았다.
결혼식 하루 동안 양부모 역할을 하고 끝날 줄 알았는데 예식 이후에도 환자의 남편이 장모님이라며 새해 인사를 챙기는 모습에 감동을 받았다고 했다.
그는 "고등학교 다니는 딸 하나밖에 없었는데 갑자기 결혼한 딸과 사위까지 생겼다"면서 행복한 얼굴이었다.
그는 또 한가지 기쁜 소식을 전했다. 서울시 예산심사에서 누락될 뻔했던 결핵환자 인문학 강의 사업을 추진할 수 있게 됐다.
그는 오는 3월부터 결핵환자를 대상으로 인문학 강의를 진행할 예정이었다.
결핵환자의 60% 이상이 노숙인, 탈북민. 그는 인문학적인 소양을 쌓는 게 이들의 치료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지하도의 무법자로 통했던 노숙인 결핵환자가 있었는데 인문학 강의를 몇차례 접하면서 달라졌어요. 나중에는 자작시까지 쓸 정도가 됐죠. 상당히 의미있는 일이 될 것 같아요."
정부는 결핵과의 존폐에 대해 논의하고 있지만, 서 과장에게 결핵과는 아직 도전해볼 게 많은, 열정을 쏟아부어야 하는 분야였다.
"현재 서북병원에는 사명감을 갖고 진료하는 5명의 결핵과 전문의가 있는데 우리와는 한마디 상의도 없이 결핵과를 없애려고 한다니 솔직히 맥이 빠지죠. 시대를 거스르거나 결핵과를 고집할 생각은 없어요. 다만 앞으로 10년만이라도 유지했으면 해요. 아직은 치료받아야할 환자들이 꽤 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