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청 맞았지. 그래도 그 손에 정과 사랑이 있었어. 요즘처럼 무슨 계약 관계같은 느낌은 아니었지."
지난 2000년 전문의를 취득하고 서울의 한 대학병원 외과 교수로 재직중인 이 모 교수. 그는 자신의 수련 생활을 이처럼 회고했다. 투박하지만 낭만이 있던 시대. 그의 한줄 요약이다.
"이단 옆차기 맞으며 배운 술기 평생의 재산"
불과 햇수로는 14년 전. 굳이 비유하면 강산이 한번 하고 절반 정도 변하는 시간이다. 하지만 수련환경은 당시와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변했다. 말 그대로 격세지감이다.
그가 수련을 받으며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은 2년차이던 1998년. 선배에게 이단 옆차기를 맞은 일이다.
"저 멀리서 선배가 이름을 부르며 뛰어오더라고. 대답하며 뒤를 돌아보는 순간 선배 몸이 붕 나르더니 그대로 이단 옆차기를 날린 거야. 나도 구르고 선배도 구르고 그랬었는데 그 선배가 날아오는 모습이 슬로우 비디오처럼 아직도 생생해."
그 정도면 평생 원수로 남았을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그는 그 선배를 인생의 스승이라고 부른다. 지금도 명절마다 선배가 좋아했던 술을 사서 직접 찾아간단다.
선배의 호통에 눈물이 찔끔거리던 날들도 많았지만 그렇게 하루하루를 긴장속에서 버텼기에 그래도 자신이 교수 명패라도 달고 있는 것이라며.
"하루 종일 맞고 욕 먹고 했지만 저녁이 되면 꼭 끌고 나가서 글라스에 소주를 마구 먹였어. 당시에는 취해서 막 대들고 했던 기억도 있는데 그냥 어깨 두드려주곤 했지. 맞고 욕먹고 저녁되면 소주 먹고 대들고. 그렇게 4년 간거지 뭐."
그렇기에 그는 지금의 사무적인 수련 방식에 아쉬움이 있다. 물론 의료인간 폭력은 없어져야 할 악습이지만 그래도 정과 사랑이 밑바탕에 있다면 그 또한 하나의 '수련'이 아니겠냐며 농을 건넨다.
이 교수는 "사실 폭력이야 어떤 방식으로도 용납될 수 없는 것이지만 이제 면허를 받아든 새내기 의사의 입장에서 바이탈을 잡는 무게감을 인식하는 기회가 됐다"며 "그래서인지 몰라도 마치 계약관계 같은 지금의 딱딱한 선후배 관계가 어색한 것도 사실"이라고 털어놨다.
"남녀 혼숙은 기본, 샤워실도 같이 썼었지"
지방의 한 대학병원에서 교수를 하고 있는 B교수도 수련환경 변화에 대해 '격세지감'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1990년대 초 수련을 받았던 그는 당시 여성으로는 드물게 외과를 전공했다. 다행히 그는 여성이라는 점을 인정(?)받아 폭언과 폭력은 다소 비켜갈 수 있었지만 그의 고충은 다른 곳에 있었다.
당시만 해도 여성 전공의가 그리 많지 않아 여성을 위한 편의시설이 전무했기 때문이다.
B교수는 "지금이야 왠만한 수련병원들이 남여 당직실을 따로 쓰지만 당시에는 사실상 돼지우리가 따로 없었다"며 "내가 옆에 있어도 남자 동기들이 속옷만 입고 늘어져 자곤 했다"고 회상했다.
이어 그는 "희한하게 당시에는 그것이 혼숙이라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며 "의대 6년, 인턴 1년을 함께 했기에 정말 식구같은 느낌이 강했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그가 가장 어려움을 느낀 것은 따로 있었다. 바로 몸을 씻을 수 있는 곳이 없다는 것이다. 여성 전용 샤워실이 없었기 때문.
"가뜩이나 타이트하게 굴러가는 전공의 시절에 샤워 자체가 사치에요. 그래도 가끔 정말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샤워가 하고 싶은데 방법이 없는 거죠. 나 샤워 한다고 아무도 못들어오게 할 힘도 없고."
그래서 그가 처음으로 생각해낸 방법은 야심한 새벽시간을 이용하는 것이다. 사람이 거의 없는 새벽 3시 정도에 몰래 샤워를 하고 나오는 것.
"그대로 혹시 모르니 불도 꺼놓고 샤워를 했어요. 사람이 들어오면 불을 켤테니 그러면 재빨리 가리려고."
하지만 연차가 쌓이자 요령이 생기기 시작했다. 친한 동기들을 포섭하거나 후배들을 보초를 세우기 시작한 것이다.
"2년차 되니까 후배가 있잖아요. 미안한 일이지만 문앞에 보초를 세우고 샤워를 했죠. 그러다 3년차 올라가니 이제는 아예 의국에서 별도 시간을 마련해 줬어요. 1시부터 1시반까지는 내가 샤워하는 시간이니 접근금지 뭐 이렇게."
그렇기에 그는 '여풍' 현상을 일으키며 의료계에 여성 의사들이 많아지고 있는 것을 고무적이라고 평가한다. 여성 전문직이 늘고 있는 것에 대한 뿌듯함이다.
"후배들이 늘어나면서 정말 많은 것들이 변했어요. 이제는 어느 과에 가도 후배들이 당당하게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고 그만큼 혜택을 받죠. 여성도 당당하게 의료계에 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 뿌듯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