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전공의 주당 80시간 근무제를 취재하기 위해 찾은 대학병원 응급실에서 흥미로운 물건을 발견했다.
취재에 응해준 전공의가 의사 가운에 4가지색 볼펜과 함께 만년필 모양의 보이스 레코더, 즉 녹음기를 꼽고 있었기 때문이다.
의사와 녹음기. 언뜻 어울리지 않는 이 물건에 대한 호기심은 이미 취재 목적과 상관없는 질문으로 이어져 갔다.
도대체 왜 그는 의사 가운에 녹음기를 차고 있던 것일까.
그에게 들은 사연은 이러했다. 때는 몇달 전. 30대의 여성 환자가 진료를 받고 퇴원한지 얼마 되지 않아 경찰을 대동하고 나타났다. 전공의에게 성추행을 당했다는 것이 이유였다.
갑작스런 경찰의 방문에 응급실은 급격히 소란해졌고 결국 소식을 들은 응급실장까지 언쟁에 가세하면서 사건은 점점 더 커져만 갔다.
다행히 일관성 없는 여성의 진술에 반해 전공의의 해명이 설득력을 얻으면서 경찰이 환자를 귀가시켜 사건은 마무리 됐지만 이 전공의는 몇날 몇일 잠을 설쳐야만 했다.
그래서 그나마 생각해낸 것이 녹음기인 셈. 병원의 특성상 촬영을 할수는 없으니 최소한 정황을 녹음해 놓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가 이처럼 예민할 정도로 방어에 나선 이유는 따로 있다. 바로 지난해 8월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 일명 아청법이 시행됐기 때문이다.
만약 그날 명확한 정황 증거가 없었다면 그는 전문의를 따지도 못한 채 10년간 면허가 정지됐을 수도 있는 상황. 그 아찔함이 그에게 녹음기라는 방어 도구를 갖게 한 셈이다.
하지만 그 사건은 그를 계속해서 옥죄고 있다. 실제로 그는 사건 이후 가능한 오해를 살만한 촉진은 하지 않고 있다고 털어놨다. 일부 필요성을 느껴도 심적 부담감에 촉진을 꺼리게 된다는 토로다.
이는 다소 극단적인 사례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같은 일은 이미 아청법이 시행된 후 의사들이 지속적으로 제기해온 문제라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10년 면허 정지라는 강한 처벌 규정 앞에서 과연 적극적으로 촉진을 할 수 있는 의사가 몇이나 될까. 더욱이 이 전공의처럼 트라우마가 생긴 상황이라면 과연 그의 소극적 진료를 비난할 수 있을까.
문제는 시간이 갈수록 이러한 트라우마를 가진 의사들이 늘어갈 수 밖에 없다는데 있다. 이미 많은 환자와 국민들은 아청법에 대해 인식하고 있고 일부에서는 악용 사례도 나타나고 있다.
이렇게 가다가는 청진기도 대지 못할 것이라는 의사들의 우려가 이미 현실로 나타나고 있는 셈이다.
물론 일부 몰지각한 의사들의 행태는 처벌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빈대 잡자고 초가삼간을 태워서는 곤란한 일이다. 의사들의 소극적, 방어 진료의 피해자는 의심할 여지 없이 명백하기 때문이다.
그나마 새누리당 박인숙 의원이 지난해 말 금고형 이상을 받은 경우만 아청법을 적용하는 아청법 개정안을 발의한 것이 다행스러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법안이 이번 19대 정기 국회에서 다시 한번 논의될 예정이다. 부디 여론에 밀려 초가삼가을 태우자고 주장하는 의원들이 없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