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이제 다 모이신 건가요? 시작해도 되겠습니까."
결국 단상에 올랐다. 센터의 모든 의사가 모인 자리. 이번 교수 회의에는 임상 교수와 전임의까지 모두 불렀다.
나는 이제 특단의 대책이라는 말로 지겨운 연설을 시작해야 한다. 비상경영체제다. 분발해야 한다면서. 사실 말은 그럴싸 하지만 결국 돈 아껴쓰고 돈 많이 벌라는 말이다.
말을 꺼내자 마자 교수들의 얼굴이 구겨진다. 차마 내 눈도 처다보지 못하는 전임의들은 대체 왜 내가 여기에 앉아 있나 당혹스러운 표정이다.
그렇겠지. 나도 다 겪은 일이다. 교수들은 정년이라도 보장돼 있으니 배째라고 버티면 그만이지만 그들은 어찌 보면 계약직 아닌가.
떨어지는 낙엽도 조심해야 하는 그들에게 이러한 말이 얼마나 가슴에 비수로 꽂힐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소신과 신념도 좋지만 다들 어려울때 아니겠습니까. 힘을 모아 분발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이런 말을 하는 저도 얼마나 죄송하고 답답하겠습니까."
유독 김명민 교수의 얼굴이 눈에 띄었다. 의도한 바는 아닌데 괜시리 말을 하며 처다볼 수 밖에 없었다. 병원내 진료실적 꼴찌.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지만 괜시리 밉다.
"죄송합니다. 더 분발하겠습니다."
김 교수가 죄송하다는 한마디를 꺼내놓는다. 따지고 보면 그가 뭐가 죄송한가. 하루에 100명이 넘는 외래 환자를 보고 틈틈히 수십건의 수술을 하고 있는 것을 안다.
그저 말 그대로 수익이 적을 뿐이다. 빌어먹을 그 진료수익 말이다.
나도 가운을 입은 의사인데 이런 말을 하는 것이 그리 기분 좋을리가 없다. 거기다 이들은 다 내 후배고 제자들 아닌가. 스승으로서 못할 짓을 한다는 생각을 떨쳐내기 힘들지만 그래도 지금 이 순간 나는 의사가 아닌 경영자가 돼야 한다.
의사 면허를 받아든지 벌써 30여년. 생각해 보니 참 많은 시간이 흘렀다.
처음 모교 병원에서 인턴을 시작하며 의국 청소를 하던 때가 엊그제 같다. 어레인지에서 밀려 그토록 원하던 흉부외과를 가지 못해 울분을 토하던 것도 아직 기억이 생생하다.
참 많이도 변했다. 선배에게 이단 옆차기를 맞아도 아무 말도 못하던 것이 전공의였다. 교수들의 조인트에 무릎에 감각이 있었었나 싶기도 했다.
쓰라린 배신의 기억도 이제는 추억이다. 꼭 교수 만들어 주겠다며 펠로우로 불러 뒤치닥거리를 시키던 그 교수. 3년이나 부려먹었는데 단칼에 나를 버렸다.
꼭 만들어 주겠다던 교수 자리는 이사장 친척이 날아와 차지했다. 그래도 미안했는지 브렌치 병원에 펠로우 자리는 만들어줬다.
그렇게 나는 변해갔다. 근면, 성실, 의학에 대한 열정. 그런 것들은 대학병원이라는 전쟁터에서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다.
늙은 여우같은 교수 뒤치닥거리를 하며 배운 것은 바로 정치였다. 그래도 그것만큼은 철저히 익혔으니 배운 것이 없다고 할 수는 없으려나.
3년간의 내공과 2년간의 노력 끝에 결국 나는 교수 명패를 받아들었다. 뒤돌아 보면 차라리 잘 된 일이었다. 모교 병원보다 규모가 작은 만큼 나는 동기들보다 빠르게 진급을 해 나갔기 때문이다.
동기들이 조교수로 수년째 썩고 있을때 나는 부교수, 정교수로 빠르게 승진해갔다. 그만큼 나는 동기들보다 빠르게 대학과 병원 생리를 익혀갈 수 있었다.
용의 꼬리보다는 뱀의 머리가 낫다 했던가. 다른 동기들이 노 교수들을 보필하며 어시스트를 하고 있을때 나는 빠르게 수술 건수를 쌓아 나갔다.
그만큼 병원에서도 나를 팍팍 밀어줬다. 그럴수 밖에. 나는 이미 병원을 먹여 살리는 스타 의사였으니까.
전화위복이라고 했던가. 그렇게 브렌치로 떨어져 나갔던 나는 그 실적을 바탕으로 다시 모교 병원에 입성했다. 그것도 동기들보다 먼저 '장'자를 달고. 홍보실장도 장이다. 장 자도 한번 달아봐야 더 높은 곳으로 갈 수 있다.
오호 이 자리는 한직이 아니었다. 언론에 계속해서 내 이름이 나가다 보니 정말 스타 의사로 발돋음을 하고 있었다. 굴러온 돌이라고 눈에 가시처럼 보던 교수들도 나를 찾아와 방송 출연을 부탁했다.
이제 나는 더이상 굴러온 돌이 아니었다. 기획실장, 센터장, 부원장으로. 한번 단 장 자는 이제 나를 로열 로드로 이끌고 있었다.
하지만 그 때까지가 좋았다. 지금 생각해보니 병원장은 맡는 것이 아니었다.
병원장에 취임하자 마자 병원계의 상황이 급속도로 나빠지기 시작했다. 병원장실에 앉아 결재만 하던 과거의 자리가 아니었다.
이 모든 책임은 나에게 돌아왔다. 하루에 한번씩 이사장실에 불려가는 것이 일과가 됐다. 이제는 대책 보고서를 내놓으란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다고.
사실 말이 좋아 병원장이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도 없다. 인사도 예산도 단 하나도 건드릴 수 있는 것이 없다.
하지만 모든 비난과 욕은 내 몫이다. 직원들은 내가 인사와 예산을 결정하는 줄 아는 모양이다. 아니라고 해명할 수도 없고 감당해야지 어쩌겠나.
그렇게 온갖 악역은 내 몫이다. 오늘처럼 돈 더 벌라고 채근하는 것이 내 역할이다. 사실 진료 수익이 올라간다고 내 월급이 올라가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다음주 이사회에서는 연구중심병원에 대한 논의가 이뤄진단다. 아마도 국내 1위 연구실적 뭐 그런 목표가 내려오겠지. 병원이, 교수가 무슨 자판기인줄 아는 모양이다.
그럼 이제 다시 악역이 나서야 한다. 나는 다시 교수들을 불러모으고 연구실적 강화니 하며 압박해야 겠지. 필요하면 부교수, 정교수 발령에 필수 사항으로 넣는다며 협박도 해야 한다.
젠장.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에 대학에서 나가 진짜 병원장을 해볼 것을 그랬다. 명함뿐인 병원장 아직도 임기가 1년이나 남았다. 그안에 리베이트 사건이나 없었으면 좋으련만.
리베이트 받는다고 나한테 떨어지는 것도 아닌데 사건만 나면 왜 병원장을 불러대는지 모르겠다. 다른 병원처럼 영업사원 출입금지 팻말이라도 붙여야 하나. 이사장님한테 건의해 봐야겠다.
*이 기사는 취재 결과를 바탕으로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사건을 에피소드로 재구성한 것으로 특정 병원이나 인물과 무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