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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기본적이면서도 어려운 환자와 라뽀

박성우
발행날짜: 2015-12-01 05:15:38

인턴 의사의 좌충우돌 생존기…박성우의 '인턴노트'[9]

'환자와의 라뽀

라뽀(Rapport)'라는 말이 있다. 프랑스어가 어원인 이 말은 '마음의 유대'를 뜻하고 심리학적으로 '사람과 사람 사이의 언어적, 그리고 비언어적 관계'를 뜻한다. 의사–환자 관계에서도 폭넓게 라뽀라는 말을 쓴다. 진단과 치료에서는 의사가 환자에게 처방을 내리고 지시하는 관계이지만 최근에는 이러한 수직적 관계 속에서도 서로 협조하는 측면이 중요하게 여겨져 라뽀가 강조되고 있다.

과거 전통적인 사회에서 의사는 가부장적인 인상의 지시자 느낌이 있었다. 반면 지금의 의사는 부드럽고 환자가 질환을 이겨나가는 데 도움을 주는 협조자의 인상으로 바뀌고 있다. 이런 변화가 의료 역시 서비스업으로 인식되면서 바뀌는 것이라고 비판하는 시각도 있다. 하지만 현대 사회에서는 당뇨나 고혈압 같은 장기 질환이 늘어나면서 이러한 치료 협조관계가 부각되고 있다.

인턴에게 있어 라뽀는 매우 간단하다. 채혈 검사, 즉 피를 한 번에 잘 뽑는가가 환자와의 관계에 있어 모든 것을 결정해 버린다. 더군다나 종합병원처럼 인턴이 하루에도 20~30명의 환자 채혈을 하려면, 한 번 만에 빠르게 해야 한다. 그것이 좋은 의사와 나쁜 의사를 결정짓는 기준이다.

그래도 채혈 검사 이외의 다른 간단한 시술들, 드레싱이나 시술 동의서 혹은 그외 술기 등을 통해 환자나 보호자와 계속해서 눈을 맞추고 이야기를 하면서 좋은 라뽀를 형성할 수 있다. 하지만 여전히 채혈이 한 번에 되는가가 인턴에 대한 첫인상을 좌지우지하는 것 같다.

외래 채혈실에서 검사가 있으면 하루에 2~5번씩 병동에서 1층으로 내려가 채혈을 해야 한다. 과감한 시도로 한 번에 채혈이 되면, "선생님 솜씨가 좋으세요. 하나도 안 아팠어요" 하면서 고마워한다.

하루는 뚱뚱한 할머니 환자분이 와서 맥박 잡기가 힘들어 채혈 검사를 세 번이나 실패했다. 도중에 보호자는 바로 다른 선생님으로 바꿔달라고 재촉하고, 할머니도 아프다고 해서 나는 졸지에 도움 안 되는 의사가 되어버렸다. 불과 한 시간 사이에 의사에 대한 환자들의 평가가 엇갈리는 것을 경험한 것이다.

가운 속으로 땀을 뻘뻘 흘리며 보호자에게 최대한 설명을 하고는 잠시 다른 동기에게 채혈을 도와달라 SOS를 요청했다. '왜 한 번에 채혈되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에 괴로웠지만 다행히 다음 환자를 한 번에 채혈하는 모습을 본 할머니와 보호자의 마음이 조금은 누그러졌는지 SOS 채혈 성공 이후에는 수고했다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병동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다른 병동 동기의 요청으로 채혈을 도와주러 갈 때가 있다. 대개 이런 경우 나와 라뽀가 쌓인 환자가 아니라 처음 보는 환자일 뿐더러 도움을 요청한 동기가 몇 번이나 실패한 탓에 보자마자 채혈을 거부하고 불만을 토로할 때가 있다. 환자와 보호자를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다른 환자들과 달리 장기 질환의 특성상 혈관 자체가 좋지 못한 경우에는 채혈 검사 역시 힘들다. 그럴 때일수록 환자와의 라뽀가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곤 한다.

한 장기 입원 환자의 경우 2주 동안 매일 인사를 하고 드레싱에 정성을 들이고 보호자와도 공감대를 형성하면서 이야기를 나누니 좋은 라뽀가 형성되었다. 그때는 채혈이 한 번에 안 되더라도 차분히 기다려주고 수고했다는 말을 듣게 된다. 그럴 때면 이런 라뽀가 단순한 채혈 검사가 아닌 수술이나 장기적인 치료에 있어 더 큰 힘을 발휘하고 중요하다는 생각을 한다.

"환자분들, 저희도 채혈이 한 번에 안 되거나 혈관 안 좋은 분들 보면 진땀 빼요."
채혈 검사를 하는 내내 "식사는 잘 하셨나요?", "오늘은 어제보다 안색이 좋아보이세요.", "할머니, 피 뽑았으니 식사 남기지 말고 다 하셔야 해요.", "채혈 검사 한 번에 되게 해볼게요." 등의 이야기를 하면 환자나 보호자 모두 긴장이 풀어지는 것을 느낄 때가 많다. 그런 라뽀 형성 후에는 복도에서 간단한 인사도 가능하다. "오늘은 아침 일찍 휠체어 타고 산책하시네요?"

아침마다 채혈하러 갈 때에도 부담을 덜 안고 갈 수 있게 되었다. 그래도 여전히 당직을 서면서 다른 병동에 처음 보는 환자나 담당 병동에 새로 입원한 환자를 처음 채혈하러 갈 때는 부담이 돼 '한 번에 끝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주사기를 집어 든다.

최근 의과대학에서는 'CPX' 라고 하여 환자 진료와 상담을 하는 데 있어 필요한 수행능력을 교육하고 실기 시험을 보는 교육 방법이 있다. 이때 강조하는 것이 의사–환자 사이의 라뽀 형성이다. 환자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지속적인 눈 맞춤, 비언어적인 몸짓과 더불어 공감하는 태도 등을 강조한다.

실제로 환자가 진료를 받는 데 편안한 느낌을 받을 수 있게 하여 병력 청취에 도움을 받는 것이다. 하지만 단순히 이런 병력 청취뿐 아니라 술기에 있어서도 라뽀 형성이 중요하다는 것을 느꼈다.병원에 오면 '의사가 어떻게 하는지 보겠다'는 식으로 팔짱을 끼고서 비협조적인 태도로 일관하는 환자나 보호자들이 있다. 모든 상황을 직면할 수밖에 없기에 라뽀를 형성하는 능력은 가장 기본적이면서 익히기 어렵고 필수적인 능력이다.

내일도 처음 보는 환자의 채혈이 한 번에 되지 않아 라뽀 형성이 깨져버릴지 모른다. 하지만 그 순간에도 몇 마디 말과 위로, 그리고 자신감 있는 태도로 환자와 보호자의 협조를 얻을 수 있게 노력해야 할 것이다.

<10편에서 계속>

※본문에 나오는 '서젼(surgeon, 외과의)'을 비롯한 기타 의학 용어들은 현장감을 살리기 위해 실제 에이티피컬 병원에서 사용되는 외래어 발음 그대로 사용했습니다.
이 글은 박성우 의사의 저서 '인턴노트'에서 발췌했으며 해당 도서에서 전문을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