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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 아들을 둔 어머니 마음과 의사로서의 '나'

박성우
발행날짜: 2015-12-04 05:15:19

인턴 의사의 좌충우돌 생존기…박성우의 '인턴노트'[10]

어머니의 마음

호흡기내과 병동에는 대부분 지긋한 나이의 할아버지나 할머니들이 주로 입원해 있다. 젊은 환자는 병동에 한두 명 정도 겨우 볼 수 있을까 말까 하다. 담당 병동에 이제 갓 스무 살을 넘긴 청년이 있었다. 희귀 혈액 질환을 앓았는데 감염 합병증이 자주 발생하여 일 년 중 집에 있는 시간만큼 병원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다고 했다. 그리고 이번 입원 역시 감염 증세와 함께 호흡곤란이 동반되어 입원하게 되었다 했다.

어릴 적부터 너무 많은 병치레를 해서인지, 청년은 주사를 끔찍하게 싫어했다. 채혈이라도 하는 날이면 피 검사 한다는 이야기만으로도 눈을 질끈 감고는 온몸에 힘을 주어 보는 사람의 마음을 아리게 했다. 그래도 밝은 친구라 말을 건네면 대답을 곧 잘해주었다. 청년은 어머니가 지극 정성으로 보살펴주었는데 매일 채혈하러 갈 때에도 속상한 마음이었겠지만 반갑게 맞이해주었다.

나의 안타까운 마음과는 비할 데 없이, 잔뜩 찡그린 아들의 얼굴을 보기 힘들 텐데도 웃으면서 "아들아 한 번 따끔하고 말자"라고 말하고는 채혈을 도와주곤 했다. 내가 주치의도 아니고, 질병에 해박한 전문가도 아니었기에 함부로 질환이나 검사 결과에 대해서는 말하지 못했다.

그나마 간단한 정보를 드리고 어머니가 말씀하시는 것을 경청하며 좋은 라뽀를 쌓게 되었다. 청년은 처음 입원했던 모습과 달리 호흡곤란과 폐렴 증세가 조금씩 호전되었고 복도를 산책하는 모습도 간간이 보였다.

병리과, 영상의학과와 호흡기내과의 전체 컨퍼런스가 있던 어느 날 급하게 병동에서 전화가 왔다. 보통은 회진이나 회의가 있어서 전화를 안 받으면 문자를 보내곤 하는데, 연달아 네 번이나 전화가 와 혹시나 하는 마음에 회의실을 나와 받았다. 급하게 치료실로 와서 심전도 검사를 해야 한다는 콜이었다.

황급히 올라가 보니 청년이 누워있었다. 어머니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경련을 일으켜 혈압이 올라가고 맥박도 빨라져 불안정한 상태로 치료실에 온 것이었다. 잠시 빨래를 하러 갔던, 항상 청년의 곁을 떠나지 않던 어머니가 도착했다. 이내 눈물을 훔치면서 왜 엄마가 잠시 자리를 비울 때만 아프냐며 어느 누구의 탓 아닌 탓을 했다.

심전도 검사를 마치는 사이, 혈압과 맥박이 모두 불안정했지만 청년은 의식이 있었다. 담당 전공의 선생님의 오더를 통해 응급 처치를 마치고는 경련이 있었기 때문에 뇌 CT 촬영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혹시 이송 도중 응급상황이 발생할지 모르니 인턴인 내가 동반했다.

검사실 앞에서 차례를 기다리던 사이 어머니는 속상한 듯 연신 아들의 이마를 쓰다듬으며 이야기했다. "왜 넌 입원할 때마다, 처치실을 왔다 갔다 해야 하니? 엄마는 너무 속상하다. 엄마가 너 건강하게 하려고 몸에 좋은 거 먹이고 이렇게 열심히 간호하는데. 빨리 나아서 집에 가자."

정말 힘들고 지치고 누구도 탓하지 못할 때는 힘내라는 말도 빈 허공의 말처럼 느껴지지 않는가. 나는 어머니의 넋두리를 조용히 듣는 것 외에는 해드릴 수 있는 게 없었다. 청년은 그 사이 살짝 잠이 들었고 어머니는 옆에있던 내게서 고개를 돌리고는 빈 복도를 오랫동안 쳐다보고 있었다. 어머니의 뒷모습이 고독하게 느껴졌다.

7시가 훌쩍 지나 한산한 시간. 정지해버린 그 순간에도 어머니의 마음 속에는 온갖 목소리가 아우성치고 있었을 것이다. CT 촬영은 몇 분도 걸리지 않았다. 그럼에도 어머니는 청년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 그 찰나에도 잘 찍고 오라며 검사실 문 앞에서야 침대를 놓았다.

다행히 청년은 별 탈 없이 촬영을 마쳤다. 어머니와 나, 그리고 이송 직원과 함께 병동으로 돌아왔다. 어머니는 병동에 올라오면서 말을 건넸다. "선생님 죄송해요. 저녁도 못 드시고… 선생님이 벌섰네요."

매번 채혈하러 갈 때면 싫어할 법한데도 잘 따라주었던 청년, 그리고 그런 처지를 모두 이해해주었던 어머니에게 죄송했다. 제가 무슨 벌을 섰냐고, 아무 일 없이 올라와 다행이라고 말끝을 흐렸다. 인턴으로 무능하게 느껴졌던 순간이었다. 동시에 의사가 환자에게 너무 많은 정을 주게 되면 오히려 치료에 역효과가 날 수 있다는 선배들의 이야기가 새롭게 다가왔다.

필요한 시기에 환자가 아파하고 보호자들이 마음 아파하더라도 과감하게 지시를 내리는 것이 궁극적으로 환자에게 도움되는 일이다. 이렇게 마음 아픈 일을 공유하다 보면 판단과 지시가 흐려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응급상황이 있기 전에는 채혈 검사도 적었고 청년이 간식도 먹고 산책하는 것을 보면서 얼굴색이 좋아졌다고 이야기를 했었는데 갑작스레 상태가 나빠지는 것을 보니 내가 일하는 곳이 병원은 병원이구나 싶었다.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았다. 그녀는 속상한 마음에 이렇게 아픈 자식을 낳았다는 자기 자신을 탓할지도 모르겠다. 어머니는 자고 있던 청년을 깨우고는 자지 말고 엄마랑 얘기하자고 했다. 혹시나 옆에 있으면 어머니가 하고 싶은 말을 못할까 봐 잠시 뒤로 빠졌는데 청년은 다시 자고 싶다며 잠이 들었다.

어머니는 나에게 이렇게 자도 괜찮냐고 물었다. "아드님이 자고 있으면 불안하신가 봐요" 하고 물으니 어머니의 눈망울에 다시금 눈물이 고였다. 마음 한켠에 지금까지 힘겹게 붙잡고 있던 끈에 대해, 어쩌면 어두운 그림자가 잠시나마 머물다 갔던 모양이었다.

청년의 병실까지 이송을 무사히 마치고 늦은 저녁을 먹으러 내려갔다. 당직이어서 언제 또 일이 몰아닥칠지 모르니 시간이 있을 때 먹어둬야 하는 것이 굶지 않는 비결이다. 잠시 수술장에 들려 갑갑하던 와이셔츠와 넥타이를 벗고 수술복으로 갈아입는데 정형외과 전공의 선배를 만났다. 선배는 힘들지 않냐는 안부를 물으며 자신의 결혼 소식을 전했다.

불과 한 시간 전 호흡마저 급박했던 청년과, 청년과 나이 차이가 얼마 나지 않는 우리들, 친한 선배의 행복한 결혼 소식을 듣고 느꼈던 삶의 비루함이 병동으로 올라가는 텅 빈 엘리베이터 안에 맴돌았다.

<11편에서 계속>

※본문에 나오는 '서젼(surgeon, 외과의)'을 비롯한 기타 의학 용어들은 현장감을 살리기 위해 실제 에이티피컬 병원에서 사용되는 외래어 발음 그대로 사용했습니다.
이 글은 박성우 의사의 저서 '인턴노트'에서 발췌했으며 해당 도서에서 전문을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