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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네 물린 환자부터 DOA(death on arrival)까지

박성우
발행날짜: 2016-02-17 05:05:29

인턴의사의 좌충우돌 생존기…박성우의 '인턴노트'[23]

DOA(death on arrival)

의사들은 3차 의료기관인 종합병원 외의 지역 병원을 ‘로컬’이라 부른다. 또는 지역 의료 현장을 로컬이라고도 한다. 한국처럼 의료에 대한 문턱이 낮은 환경에서는 로컬에서 별의별 상황을 맞이할 수 있다. 혈혈단신 혼자서 상황을 타개해야 하는 경우도 많다. 무협지 용어를 빌리자면 '강호(江湖)'라고 할 수 있다.

로컬은 의사들 사이에 경쟁도 심하다. 어쩌면 의술뿐 아니라 경영과 서비스 능력을 발휘해야 하는 만큼 종합병원처럼 '문파'의 비호를 받지 못해서 강호무림이라 부르는 것은 아닐까.


강호에서는 뉴스에서 접하는 상황들을 눈앞에서 겪기도 한다. 특히 지역병원 응급실에는 그 지역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모두 볼 수 있다. 교통사고가 나서 어디가 부러지거나 다쳐서 오는 것은 일상이다. 농사일을 하다가 손가락이 쓸리거나 넘어져서 피를 철철 흘리는 것은 그나마 진료가 편한 편이다. 그런 상황에도 초짜 인턴 혼자 받아들여야 하기에 자연스레 '내공'이 늘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를 동기와 나눈 적도 했다.

수련시절 거대한 종합병원의 문파 아래서 배움을 구하다가 스스로 강호로 뛰쳐나가 다음 과정을 수련하는 의사들의 모습. 선배들은 강호를 겪어보지 못하고 종합병원에 있어서는 의료 전체를 볼 수 없다고 했다.

'DOA(death on arrival)'는 환자가 병원 도착 당시 이미 숨을 거둔 상태를 의미한다. 보령 병원에서 DOA 환자가 오면 먼저 응급실 당직 인턴이 사망한 것을 확인하고 응급실 과장님에게 보고한 후 사체 검안서를 작성한다.

DOA 환자의 실제 사망 여부를 확인하고 과거 병력 및 발견 당시 어떠한 상태였는지 확인했다. 추정 사망 원인을 확인하고 의료법에 기거하여 사체 검안서를 작성했다. DOA 환자의 사망 여부를 확인하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 아니다. 동공 반응을 확인하려면 시신의 눈을 직접 봐야 한다. 차갑게 굳은 시신의 맥박을 확인할 때면 장갑을 통해 전해지는 얼음장 같은 죽음의 기운이 께름칙하다.

집에서 노환으로 돌아가신 분들의 시신은 그래도 깨끗하고 사체 검안이 편하지만 독거 노인의 시신처럼 늦게 발견돼 부패되거나 바다에 빠져 사망한 시신의 경우에는 손상이 심해 사후 처리의 어려움이 크다. 부패 악취가 응급실에 진동하기 때문에 검안용 마스크도 무용지물이다.

어느 날 자정, 119구급대에 의해 젊은 남성이 응급실에 도착했다. 이미 구급차 안에서 숨을 거둔 상태였는데 가슴에는 칼에 찔려 깊숙한 상처가 나 있었다. 형제 간 다툼에서 형이 동생을 찌른 사건이었다. 동생의 시신을 검안하는 동안 응급실 내에서는 경찰 조사가 진행됐고 싸한 기운이 응급실을 감돌았다. 사건 사고로 인해 사망한 경우 손상 부위의 자세한 기록이 필요하고 차후 여러 문제 때문에 보호자와 경찰들을 대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술에 잔뜩 취해 인사불성이 되어 오는 사람들, 싸우다가 시퍼렇게 눈이 붓거나 찢어지고 코뼈가 부러져서 오는 사람들은 늘 있는 일이었다. 간혹 뉴스에서 보도하는 응급실에서 난동 부리고 싸우는 CCTV 속 모습이 실제로 눈앞에서 펼쳐지기도 했다.

새벽 5시경 당직실에서 쉬고 있는데 환자가 왔다고 하여 간단히 세수를 하고 나갔다. 우당탕 싸우는 소리가 들렸고 몸에 문신이 가득한 조직폭력배 2명이 얼굴이 피투성이가 된 아저씨를 폭행하고 있었다. 급하게 구조대원들과 말리고 경찰에 신고하여 현장에서 체포되고서야 상황이 정리됐다.

셔츠를 벗고 가위를 들고는 "너 죽여버린다"고 외치는 통에 경찰에 연행되는 순간까지 살벌했다.

또 하루는 싸우다가 누구에게 맞았는지 눈이 부은 술 취한 아저씨가 가해자가 병원에 오는지 안 오는지 하염없이 기다렸다. 30분마다 응급실에 찾아와서는 "누구누구 안 왔어요?" 하고 묻고는 밤이 될 때까지 유령처럼 병원을 배회했다.

서울에서 보기 힘든 뱀이나 지네에 물려 오는 환자들도 꽤 있었다. 지네에 물려 오는 환자들의 상처를 보면 빨갛게 퉁퉁 부어있었다. 환자들은 저릿저릿하고 아프다고 했다. 살아있는 지네를 실제로 본 적도 없는데 밤에 자다가 물렸다고 하니 신기할 따름이었다. 예전에는 지네가 귀에 들어가 발작하는 환자까지 온 적이 있었다고 하니 놀랍기만 하다.

요양 병원에서 치료가 불가능해 노쇠한 할머니 한 분이 오셨는데 응급실 초진 기록지에 연세가 109세로 적혀있었다. 109세이면 1902년에 태어났다는 건데 100년하고도 9년을 더 산 역사의 산 증인이었다. 기운이 노쇠하여 말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고 움직이지도 못하셨다. 안타까웠던 것은 보호자를 찾는 질문에 요양 병원 관계자를 답한 것이다. 할머니 자식들은 연락도 안 되고 찾으러 오지도 않는다는 이야기를 하던 간호사는 109세 할머니를 진찰한 것을 영광으로 알아야 한다며 웃으셨다.

아기가 열이 나서 새벽에 찾아오는 가족 중에 쉰 살은 넘어 보이는 중년 아버지와 이십대 젊은 어머니가 자주 눈에 띄었다. 농촌 총각에게 시집 온 동남아 여자들의 경우였다. 시골길 전봇대에서 심심치 않게 발견할 수 있는 '국제결혼', '베트남 처녀' 등의 현수막 문구처럼 한국 문화의 한 측면으로 자리 잡은 다문화 가정의 존재를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홀로 보령의 응급실을 지키면서 한국 사회의 보이지 않는 어두운 면들을 겪을 수 있었다. 성인이 된 후에도 좋은 환경이라 느끼지 못했던 일상들이 이곳에서 느껴지는 삶의 파편들과 비교하면 얼마나 안전하고 편한 삶인지 새삼 느끼는 계기가 되었다.

어쩌면 의사의 수련 과정에 온실 속 화초처럼 성장한 지식인이 다양한 삶의 비극을 간접적으로 겪는 과정도 포함될 것 같다. 정신과 전문의 선배는 인턴, 레지던트 수련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했었다. 인턴, 레지던트 기간 없이 특히 지방 파견 근무 없이 졸업한 채 바로 개업하는 의사들의 고민은 학생 때 하던 고민의 연장선에 있을 뿐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의학보다도 삶 자체에 대해 더 많이 배우는 날들이어서 그럴까? 의사가 아니면 마주치기 힘들 경험 하나하나가 소중하게 여겨졌다

<24편에서 계속>

※본문에 나오는 '서젼(surgeon, 외과의)'을 비롯한 기타 의학 용어들은 현장감을 살리기 위해 실제 에이티피컬 병원에서 사용되는 외래어 발음 그대로 사용했습니다.
이 글은 박성우 의사의 저서 '인턴노트'에서 발췌했으며 해당 도서에서 전문을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