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변을 따라 걸어서 자다르의 구시가지로 들어간다. 지금은 바다 쪽으로는 열려 있지만, 자다르의 구시가지는 로마 줄리우스 시저와 아우구스투스황제 시절에 건설되었다. 시가지 서쪽으로는 로마 광장, 성당, 사원 등이 있다.(1)
3세기 무렵 완성된 자다르의 로마광장(Roman forum)은 아드리아해의 동쪽에서는 가장 큰 것이다. 이곳은 주로 물건을 파는 시장의 기능을 하던 곳으로 가게가 들어선 건물이나 노점을 위한 회랑이 만들어져있다. 로마광장을 지나면 구시가지 서쪽에 성당과 교회 등이 모여 있는 곳이다. 이곳에서 볼 수 있는 로마시대의 유적으로는 대리석기둥으로 장식된 두 개의 장방형 구획과 마을 동쪽에 세워진 로마탑 그리고 로마수도교의 흔적들이다.
로마광장 동쪽으로는 성모(St. Mary)교회와 수녀원이 있다. 베네딕트파의 수녀원은 1066년 자다르의 귀족가문 출신의 치카(Cika) 수녀의 서원과 페타르 크레시미르4세왕의 지원으로 짓기 시작하여 1091년에 봉헌되었다.
치카수녀의 딸 베케네가(vekenega)수녀는 크로아티아-헝가리왕국의 콜로만(Koloman)왕의 재정지원을 얻어 성당의 참사회홀과 종탑 등을 지었다. 종탑에는 1105년 새긴 콜로만왕의 이름을 볼 수 있다고 한다.(2) 이름을 남기고자 하는 욕망에는 귀천이 없나보다.
성모교회의 옆으로는 1830년에 설립된 고고학박물관이 있다. 일정 때문에 박물관 내부를 돌아보지 못했지만, 박물관 앞에는 돌로 만든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옛날의 성벽이나 건물의 기둥의 잔해로 보이는 것도 있고, 무거워 보이는 석관들도 모아놓았다. 석관은 고대 이집트로부터 그리스를 거쳐 로마에 전해진 독특한 장례문화의 하나이다.
고대 로마의 일반서민은 죽은 사람을 화장하여 재와 유골을 함에 담아 콜로바리움이라고 하는 제단에 안치하였는데, 상류층은 사르코파구스(sarcophagus)라고 하는 석관을 유골함으로 사용하였고, 석관을 남들이 볼 수 있는 곳에 놓았다. 4세기는 석관의 황금시대라고 부를 정도였는데, 이 무렵에는 고인의 시신을 석관에 안치함으로써 망자에게 또 다른 세계에서의 행복의 자리를 마련해준다는 인식이 퍼져있었기 때문이다.
기독교가 공인받기 이전인 서기 161년 황제에 오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명상록'에 '만일 사후에도 영혼이 살아있다면 우리를 감싸는 대기는 태고 이래로 죽은 자들의 영혼을 수용할 공간을 어떻게 마련하겠는가?(3)'라고 적어 육체는 물론 영혼까지도 필멸한다고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
즉, 석관은 죽어서 하느님의 나라로 가게 될 것이라는 기독교의 영향으로 유행하게 된 것이 아닐까 싶다. 물론 초기 기독교에서도 매장을 선호하다가 로마의 핍박을 받을 무렵에는 카타콤이라고 하는 지하묘지에 안치하는 방식을 사용하기도 했기 때문에 천국이라는 개념은 뒤에 만들어진 것은 아닐까?
그리스문명이 남긴 석관에는 주로 그리스신화에 등장하는 인물을 부조로 남겨놓았는데, 3세기 중반 무렵 제작되기 시작한 기독교적 석관에는 예수의 모습을 새기다가 4세기 들어서는 신약의 주요 장면들을 부조로 표현하기 시작했다.
그렇기 때문에 로마의 석관은 고대 기독교 예술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석관의 제작은 5세기 초반, 게르만족의 침입이 활발해지면서 로마사회의 불안이 고조되면서 줄어들었다고 한다.(4)
로마광장 서쪽으로 성 도나트 교회가 있다. 처음에는 27미터 높이의 삼위일체 탑을 세웠다가, 9세기 무렵 주교 도나트(Donat)가 원통형의 성당을 지었다. 커다란 돔을 얹은 원형건물로 역시 원형의 화랑으로 둘러싸여 있는 이중구조이다.
달마시아지방에 남아 있는 동 시대의 유적으로 매우 중요한 것이다. 성 도나트교회를 끼고 왼쪽으로 돌아가면 로마식 기둥이 서 있는데, 로마제국 시절 죄인을 여기에 묶어두었다고 한다. 기둥에 묶여 한낮의 뜨거운 햇볕에 고스란히 노출되면 숨이 절로 넘어갈 터이니 고문도 그런 고문이 없었을 것이다.
로마 기둥을 지나 오른쪽으로 난 좁은 골목에 들어서면 오래된 종탑이 서 있고, 조금 더 들어가면 조그만 마당에 성 아나스타샤(St. Anastasia)교회가 있다. 펠릭스(Felix)가 자다르의 첫 번째 주교로 주석한 것은 4세기 말이니 당시부터 성당이 있었을 것이다.
도나투스주교시절 성당은 베드로를 수호성인으로 모셨다가, 니케포로스1세(Nikephoros I) 황제로부터 성 아나스타샤의 유골을 받음으로써 아나스타샤를 수호성인으로 모시게 되었다. 12세기 무렵 아나스타샤교회는 알렉산더 7세(Alexander VII)교황의 명으로 3개의 회랑으로 된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당으로 개축되어 1177년 봉헌되었다.
하지만 1202년 베네치아가 연합한 십자군의 침공을 받았을 때 심각할 정도로 손상을 입는 바람에 오랜 기간에 걸쳐 보수공사를 마치고 1285년에 다시 봉헌되었다.(5) 달마시아지역에서는 가장 큰 성당이다. 정면으로 두 개의 장미모양의 창이 나있으며 대성당 앞에는 1748년에 문을 연 로마 가톨릭 신학교가 있다.
교회 앞마당이 좁은 탓에 전체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을 수 없는 것이 아쉬웠다. 성 아나스타샤교회를 돌아 나오다 보면 교회 담벼락 아래 수공예품을 늘어놓고 파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오후의 태양이 뜨거운 탓인지 왕래하는 사람들이 적어 한산한 모습이 공연히 짠하다.
마침 점심시간이 되어 가이드를 따라 구시가지의 골목길을 이리저리 돌아 식당으로 향한다. 길은 아파트의 마당을 지나기도 하는데, 2층과 3층의 통로에는 예쁜 꽃을 심은 화분들이 놓여있고, 빨래도 걸려 있는 모습이 정겹다.
이윽고 작은 마당이 나오고 조그만 성당이 서 있다. 십자가의 모양을 보니 동방정교회인데, 가이드말로는 성슈테파네지교회라고 하는데, 확인되지 않았다. 크로아티아는 국민 대부분이 가톨릭을 믿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꼭 그런 것만은 아닌가 보다.
교회 마당가에 있는 작은 식당에 들어서니 점심시간이 이른 탓인지 한산한 분위기이다. 이날의 점심메뉴는 오징어튀김이었다. 학생 때 이대앞 구멍가게에서 간식으로 먹던 오징어튀김을 점심으로 먹는 독특한 경험이었다. 튀김에 곁들여진 스프는 부스러뜨린 생선살로 만들었는데, 북어로 끓인 해장국처럼 시원한 맛이 있었다. 점심 식사를 하고 자유 시간을 얻었다. 가이드의 설명을 듣느라 혹은 일행들이 가리는 바람에 사진을 찍을 수 없었던 유적들을 다시 돌아보았다.
#i6#자다르 해변의 해넘이가 가장 아름다웠다고 적은 글이 인터넷에 넘쳐나고 있어 우리도 그 환상적인 해넘이를 꼭 보고 싶었지만, 빼곡하게 잡혀 있는 일정을 소화해야만 하는 단체여행이라서 어쩔 수 없다. 이날 오후로 잡혀 있는 토르기르를 향하여 2시에 자다르를 떠났다. 중천에 떠있는 해가 서쪽으로 기우는 듯해서 더욱 아쉬운 생각이 든다.
참고자료
(1) 두루가이드. 자다르 구시가지.
(2) Wikipedia. St. Mary's church. Zadar.
(3)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지음. 삶이 나에게 가르쳐 준 것들 65쪽, 리더북스 펴냄, 2014년.
(4) 남성현 지음. 고대 기독교 예술사 323쪽, 이담북스, 2011년.
(5) Wikipedia. Zadar cathedra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