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트라둔의 왼쪽 끝에 있는 건물이 스폰자궁전(Sponza Palace)이다. 건축가 파스코예 밀리체비치(Paskoje Miličević)의 설계로 1516년부터 1522년에 걸쳐 지은 스폰자궁전은 성안에 있는 건물의 4분의 3이 무너진 1667년의 지진에서도 무사했던 몇 안되는 건물 가운데 하나이다.
'Sponza'는 빗물이 모이는 장소를 의미하는데, 건물을 짓기 전에 우수처리장이 있었기 때문이다. 안뜰이 있는 커다란 직사각형의 건물은 당시 유행하던 고딕양식과 르네상스양식을 혼합하여 지었다. 현관은 루자광장으로 열려있다. 현관과 건물의 조각들은 코르출라 출신 안드리이치(Andrijić) 형제가 1516년에 만든 작품이다. 뒷벽에 있는 예수 모노그램과 두 명의 천사를 새긴 아름다운 메달은 조각가 벨트란드 갈리쿠스(Beltrand Gallicus)의 작품이다.
라구사공화국 시절에는 세관과 보세창고로 이용되었는데, 내항에서 들어오는 플로체문(Ploče Gate)이 바로 인근에 있다는 점을 보면 적절한 장소에 위치한 셈이다. 개별 보세창고의 저울이 걸려 있는 고실의 아치에 성자의 이름이 대문자로 새겨져 있다. 아치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새겨진 것을 보면, 그 시절에도 계량의 중요성이 강조되었던 것 같다.
"FALLERE NOSTRA VETANT; ET FALLI PONDERA: MEQUE PONDERO CVM MERCES: PONDERAT IPSE DEVS (우리의 형법은 속이거나 속임을 당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내가 상품을 계량할 때는 신께서도 함께 하신다)"
스폰자궁에는 조폐국, 은행, 재무국 그리고 무기고와 같은 공공기관이 들어오기도 했다. 16세기가 저물 무렵, 시인들로 구성된 박물관(Academia dei Concordi) 회원들이 1층에 있는 커다란 회의실에 모임을 가졌는데, 이는 두브로브니크의 첫 번째 문인연구소였다.(1) 이런 역사적 배경 때문인지 마침 기타를 연주하기 시작한 악사가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
성 블라이세성당에서 왼쪽 길로 가면, 왼편으로 시청과 렉터궁(Rector's Palace)이 이어진다. 렉터궁은 중세에 수비대건물이 있던 장소에 세워졌다. 1296년에는 요새라고 했고, 1349년에 들어서 궁전이라고 불렀다. 1435년에 화재로 건물이 피해를 입자 정부는 아름다운 새 건물을 짓기로 하고 오노프리오에게 공사를 맡겼다. 1436년 수도공사를 마친 오노프리오는 렉터궁 건축에 착수하여 2층으로 된 고딕양식의 산뜻한 건물을 지었다.
양쪽에 두 개의 탑을 두고 현관에는 기둥을 세웠다. 현관기둥의 현란한 장식은 밀라노의 조각가 피에트로 디 마르티노가 완성했다. 1463년에는 궁전의 무기고에서 화약이 폭발하는 바람에 심각한 손상을 입어 프로렌스의 유명한 건축가 미첼로조 디 바르톨로메오 미첼로찌(Michelozzo di Bartolomeo Michelozzi)에게 재건축을 맡겼다.
이때 현관의 기둥은 르네상스양식으로 교체되었다. 1520년에 발생한 지진으로 건물이 부서졌을 때는 코르출라 출신 페타르 안드리이치(Petar Andrijić)가 보수를 맡았다. 1667년의 대지진 때 건물 대부분이 무너졌고, 바로크양식으로 다시 지었다.(2)
렉터궁은 두브로브니크를 다스리는 렉터가 거주하는 곳이었다. 두브로브니크에는 상위위원회, 하위위원회 그리고 원로원이 있었다. 렉터는 50세가 넘은 상위위원 중에서 선출하여 한 달동안 도시를 다스렸다. 연임도 가능했는데, 렉터로 복무하는 동안에는 친구는 물론 가족까지도 만날 수 없었다.
렉터궁전은 이제 두브로브니크 박물관의 역사부가 사용하고 있다. 대부분의 방은 옛날 분위기가 나는 가구를 들였고, 귀족들의 초상화와 코트, 무기, 옛 거장들의 그림, 공화국에서 발행한 동전, 도시 성문에 사용하던 키, 주요 문서 등을 전시하고 있다.
렉터궁전을 지나면 대성당이다. 본래 이 자리에는 12~14세기경에 지은 로마네스크 양식의 대성당이 서 있었다. 수많은 조상(彫像)으로 장식되어 화려했던 돔이 있는 바실리카양식의 성당은 1667년 대지진에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전설에 따르면 로마네스크양식의 성당은 영국의 사자왕 리처드의 후원으로 지었다고 한다. 3차 십자군전쟁에 참전했던 리차드왕이 1192년 영국으로 돌아가던 길에 아드리아해에서 폭풍을 만나 조난당했는데, 두브로브니크 성 앞에 있는 로크룸(Lokrum)섬에 좌초하여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고 한다.
왕은 신의 은혜에 감사드리기 위하여 로크룸섬에 커다란 교회를 짓기로 했지만, 약삭빠른 두브로브니크 지도자들의 설득에 넘어가 성안에 교회를 짓게 된 것이다. 사자왕과 두브로브니크의 인연은 뒷날 세익스피어에게 전해서 희극 '십이야'의 무대가 되었다.
이런 인연은 지금까지도 이어져 매년 여름에 열리는 두브로브니크 축제 기간 중에 두브로브니크 성밖에 있는 로브리예나체 요새에서 <햄릿>을 공연하는데, 요새의 분위기가 <햄릿>을 표현하기에 아주 적합한 장소이기 때문이다.
간혹 사자왕이 비잔틴양식의 성당을 로마네스크양식의 성당으로 바꾸어 주었다고 설명하는 경우도 있다. 이는 1981년 현재의 대성당을 보수하는 과정에서 옛 로마네스크 성당의 기초 아래에서 또 다른 성당을 발견한데서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그 성당의 기원은 7세기 무렵 비잔틴제국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으로 추정되었다.
당시 이런 규모의 대성당이 존재했다면 두브로브니크는 상당한 규모의 도시였을 것이다. 따라서 무너졌던 로마네스크양식의 대성당은 어떤 이유에서든지 무너진 비잔틴양식의 성당 터에 다시 지었던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로마네스크양식의 대성당이 1667년의 대지진에 무너진 다음 두브로브니크 의회는 빠른 시일에 성당을 다시 짓기로 했다. 당시 바티칸 도서관의 후원자였고, 뒷날 렉터을 역임한 스테판 그라디치(Stjepan Gradić)가 우르비노(Urbino)에서 온 건축가 안드레아 부팔리니(Andrea Buffalini)를 추천하여 로만-바로크양식으로 짓기 시작하였다.
부팔리니는 회중석이 셋인 돔 교회를 설계하여 1713년 완공을 보았다. 대성당이 있는 자리에는 비잔틴양식의 성당, 로마네스크양식의 성당 그리고 지금의 바로크양식의 성당으로 이어지는 묘한 인연을 가진 셈이다.
정면 파사드에는 네 개의 코린트식 기둥이 입구를 구성한다. 중앙의 꼭대기에는 커다란 바로크양식의 창문이 있고, 삼각형의 박공과 성자상을 세운 난간으로 장식되었다. 파사드 오른편에 있는 홈에는 성 블라이세의 조각상이, 왼편에는 요셉과 아이가 들어있다. 성당의 측면은 단순해서 기둥이 늘어서 있고 사이에는 반달의 창문이 나 있다.(3)
두브로브니크 대성당은 아드리아해 연안에서 가장 많고, 중요한 유물을 보유하고 있는데, 도시의 수호성인 성 블라이세의 머리와 손발의 유골을 비롯하여 수많은 그림을 꼽을 수 있다. 그림 가운데는 13세기 화가 파도바니니(Padovanini)가 그린 로마네스크-비잔틴양식 '성모자'와 함께 티티아노(Titian Vecelli)가 1552년에 그린 성모승천(Ascention of Mary)이 손꼽힌다.(4) 대성당을 성모승천성당이라고 부르는 연유이기도 하다.
성모승천성당의 앞 광장에서 동쪽으로 나있는 폰테문(Ponte Gate)을 나서면 옛 항구이다. 항구에는 유람선과 요트 등이 누군가를 기다리며 출발을 준비하고 있다.